[2017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부문 가작] 구제(救濟)
[2017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부문 가작] 구제(救濟)
  • 박영준<국문대 한국언어문학과 13> 군
  • 승인 2017.12.03
  • 호수 1469
  •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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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돈(母豚)이 죽었다. 전날 새벽 출산 때도 힘들어 보였는데 결국 날을 새지 못한 것이다. 슬금슬금 모인 구더기들이 모돈의 몸을 타고 오르려 하고 있다. 사타구니에서는 묽은 대변과 양수가 섞여 끔찍한 냄새가 났다. 새끼들이 나오지도 않는 어미의 젖을 맹렬히 빤다. 여자는 새끼들을 집어 들어 다른 모돈에게 나눠준다. 갑작스레 어미와 떨어지게 된 새끼들은 비명을 지른다. 여자는 상향관리서에 쓰인 정보를 지우고 죽은 모돈의 입천장에 빠루를 꽂는다. 너무 얕게 박으면 끌고 갈 때 빠지기 때문에 있는 힘껏 박는다. 모돈의 눈에 피가 고인다.

돼지 시체는 여자 혼자서 끌기 힘든 무게다. 더군다나 모돈은 다른 돼지들보다 몸집도 크다. 여자는 빠루 주둥이 부분을 잡고 모돈을 질질 끌고 간다. 어깨가 저리고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문득 말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농장 직원들끼리 믹스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여자가 익숙한 담배 냄새를 맡고 고개를 든다. 남자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다시 고개를 떨구고 분뇨 처리장 안으로 들어간다. 들어간다고 해봤자 문이 없고 앞이 휑하니 뚫려있기 때문에 곧장 모돈을 끌고 갈 수 있었다. 분뇨처리장은 100평이 넘었지만 가득 차기까지는 열흘도 걸리지 않았다. 콘크리트 위에 철근과 판넬로 지붕만 만들었기 때문에 사방이 뚫려있었고, 따로 냄새를 거르는 장소도 없어 이곳의 냄새는 농장 전체에 퍼졌다. 여자가 들어간 그 순간에도 분뇨처리장에는 이미 분뇨가 절반 넘게 찬 상태였다. 처음엔 구역질이 났지만 여자는 이내 무덤덤해질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냄새는 여자가 자고 있는 숙소까지 집요하게 새어 들어갔다. 혐오도 마치 후각처럼 쉽게 피로해지는 성질이 있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여자는 분뇨 앞에 돼지를 놓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다.

“거기 갖다놔서 뭐할래? 더 가 더!”

여자가 남자를 돌아본다. 남자는 태연하게 여자를 바라보며 담배를 빨고 있었다. 빠루를 잡은 여자의 손에 힘줄이 튀어나온다. 여자는 분뇨더미 깊숙이 들어간다. 남자는 계속해서 더! 더! 더!라고 외치며 여자를 재촉한다. 여자는 빠루를 놓고 숨을 몰아쉰다. 분뇨더미를 아예 손으로 집어 돼지의 몸 위에 쌓는다. 시체가 완전히 덮이자 어느새 여자는 분뇨 범벅이 되어있었다. 구더기가 여자의 목장갑 위에서 꿈틀댄다. 여자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하늘을 쳐다본다. 해가 지고 있었다. 여자는 얼른 숙소로 돌아가 씻고 싶은 마음에 몸을 일으킨다.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여자를 불러 세운다.

“넌 새끼야, 남편 말을 귓등으로 듣지? 내가 지난번에 뭐라 그랬냐? 분뇨에 덮어놔야 시체가 빨리 썩는다고.”

여자는 걸음을 멈추고 남자의 표정을 살핀다. 무표정인 상태에서 눈꼬리만 살짝 위로 치켜올라가 있다. 남자가 자신을 과시하고 싶을 때마다 짓는 표정이었다. 여자는 말을 아꼈다.

“너 그리고 저 모돈은 씨발 왜 죽었어?”

여자는 남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흥분하면 쉽게 말이 빨라지곤 했는데, 그 뒤에 나오는 여자의 말은 항상 같았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여자의 말이 답답한 나머지 들고 있던 목장갑으로 여자의 머리를 후려친다. 여자가 더 말하려다가 입술을 꾹 문다. 남자는 ‘저게 씨발 얼마짜린데…’라는 말을 남기며 숙소로 걸음을 옮긴다.

2

여자는 냉장고에서 된장국을 꺼낸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자 따뜻한 열기가 올라온다. 남편과 직원들이 두런두런 사무실에서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여자는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여자가 부엌을 서성거리자 파리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여자가 팔을 휘휘 젓는다.

부엌에는 파리가 가득했다. 처음 여자는 에프킬라나 끈끈이 테이프 같은 것들을 사기도 했지만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게 파리는 계속해서 꼬였다. 돼지농장이니까 그러겠지 싶다가도 밥을 준비할 때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잠깐이라도 음식물을 꺼내놓으면 파리는 금새 곰팡이처럼 들러붙었다. 남자는 밥 위에 파리가 앉으면 ‘여자가 얼마나 집안일을 소홀히 하면 집안에 파리가 이렇게 꼬이냐’라며 여자를 흘겨봤다. 여자가 에프킬라나 끈끈이 테이프를 사오면 남자는 돈지랄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면서 여자를 다시 마트로 되돌려 보냈다. 여자는 자신이 산 물건이 과연 남자가 말한 ‘돈지랄’이 맞는지, 카운터에게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때부터 여자의 취미는 파리채로 파리를 잡는 것이었다.

냄비 뚜껑이 달그락거리면서 된장국 냄새가 부엌 가득 퍼진다. 여자는 한국음식에 적응하지 못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고향음식이 먹고 싶을 때가 있었다. 여자는 문득 ‘퍼’가 생각났다. 하노이에서는 아침식사가 저렴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에서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여자 또한 공장으로 향하기 전 동생과 ‘퍼’를 먹었다. 값이 저렴한만큼 양이 많진 않았지만 얇은 소고기가 조금 들어가 있었고, 세지 않은 향신료를 사용해 국물 맛이 은은했다. 좁은 식탁에서, 플라스틱 막의자에 앉아 모르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아침을 먹었지만 대부분 낯익은 얼굴들이라 오히려 정감이 갔다. 여자와 동생은 별 말 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쌀국수를 먹었고, 또 별 말 없이 각자의 일터로 떠났다. 그렇게 세상보다 조용히 퍼를 먹던 동생이 고마웠다. 일하는 동안에도 쌀국수가 몸속에 남아 오래도록 따뜻하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동생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라고, 여자는 혼자 된장국을 국자로 뜨며 생각했다.

“국 끓이다 날 샌다. 날 새.”

여자가 두 손으로 냄비를 든 채 낑낑대며 부엌문을 열자 남편이 말했다. 직원들은 자기들끼리 웃다가 여자가 문을 열자 자기들끼리 눈치를 살핀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테이블에 냄비를 올려두고 다시 밥과 반찬을 가지러 부엌으로 향했다. 여자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다시 직원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파리보다 조용히 밥을 푼다.

3

“응, 들어왔더라. 걱정 안해도 돼 언니.”

여자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진다. 모질게 굴긴해도 돈에 대한 것이라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남자의 성격이라고, 여자는 파리채를 내려치며 생각했다. 배가 터진 파리가 파리채에 들러붙는다.

“그래서 너 일은 할만하고?”

동생은 태연하게 그렇다고 했다. 여자는 계속해서 파리를 내려치며 일상적인 질문을 했다. 밥은 요새 뭐 먹고 다니냐, 항상 차조심해라, 차 조심만 아니라 공장에서 일할 땐 뭐든지 조심해라, 잘 되는 남자는 없냐……. 동생은 일상적인 질문에 일상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항상 차는 조심했고, 밥은 세 끼 잘 챙겨 먹었고, 주위에 남자는 없었지만 동생에게 모질게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언니는 거기 일 할만해?”

여자도 잘 지낸다고 말했다.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삼천키로나 떨어져 있는 사람의 안부를 확인할 방법은 오로지 상대방의 말 뿐이었다. 마치 하노이의 식당에 온 것 같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아, 나 근데 이 돈으로 집에 전화기 하나 사려고. 언니도 거기 오래 있을텐데 전화할 때마다 밖에 나가기 그렇잖아.”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자신의 집에 전화기를 놓는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베트남에서는 여자와 동생 둘 다 공장으로 출근해 10시간씩 일을 해도 한 달 생활비를 겨우 벌 수 있었다. 두 명은 월 2회 쉬는 날을 제외하고 공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해도 벌 수 있는 돈은 두 명 합쳐서 280만 동으로, 한국 돈으로 30만원 정도였다. 식비, 교통비, 월세를 다 내고 나면 딱 밥 한끼 정도 사먹을 돈정도만 남았다. 임금은 거의 그대로였지만 물가는 미친듯이 올라 뉴스에서는 인플레이션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들렸다.

4

남자는 축구 중계를 보고 있다. 여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남자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국팀이 상대편의 골대에 가까워지자 앵커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턱을 괴고 누워있던 남자가 바로 일어나 TV 가까이 다가간다. 여자는 남자와는 상관없이 사과를 깎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공을 잡은 공격수가 상대편의 골대 앞까지 왔다. 수비수가 전력으로 달려가지만 공격수의 슈팅을 막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공이 힘차게 날아가 골대 뒤로 넘어간다. 앵커의 탄식과 함께 남자의 욕설이 들려온다. 씨발 저기서 못넣냐……. 남자는 여자가 깎아놓은 사과를 하나 집어먹으며 다시 눕는다. 남자는 자신이 먹던 사과를 쳐다보더니 뒤돌아 여자에게 시선을 돌린다. 여자는 남자의 눈을 슬쩍 피한다.

“너 손은 씻었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는 사과를 천천히 씹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찝찝하니까 다시 손을 씻고 오라고 말했다. 여자가 왜 또 씻어야 하냐고 묻자 남자는 한숨을 쉬며 먹다 남은 사과를 가볍게 여자의 얼굴에 던진다.

“가라면 가라 똥내 나니까.”

여자가 손을 씻다 세숫대야에 비친 자신을 본다. 거무튀튀한 피부 위로 더 어두운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뒤로 묶은 머리 위로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이 삐져나왔고 눈커풀은 축 가라앉아 있었다. 날마다 힘을 써서 그런지 손이 퉁퉁 부운데다가 손톱 밑의 살이 벌어져 작은 통증이 느껴졌다. 여자는 자신의 팔을 매만진다. 일과 시간에 무거운 것을 끌어서 그런지 어깨와 팔뚝이 저리다. 파스를 붙여야겠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너는 남들보다 더 많이 씻어야 돼. 내가 동남아 일꾼들 자주 만나봤는데, 그 특유의 땀냄새가 있다니까.”

여자가 씻고 돌아오자 남자는 다시 잔소리를 시작했다. 예전에도 들어봤던 말이기 때문에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지만 여자는 자신의 몸에 벤 냄새가 농장 냄새라고 생각했다. 폐기물처리장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는 숙소까지 번졌기 때문에 일을 할 때도, 잘 때도 여자는 그 냄새에 뒤덮여 생활했다. 그것은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광고가 시작되자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한다.

남자가 ‘뭐여?’라며 소리친 것은 방을 나간 직후였다. 여자는 안좋은 낌새를 눈치채고 안방을 나간다. 남자가 한 손에 빨래 건조대를 들고 여자를 노려보고 있다.

“이거 뭐냐?”

여자는 최대한 자신이 아는 한국말을 사용하여 빨랫감이 많아서 샀다는 말을 힘겹게 내뱉는다.

“아니 예전에는 그럼 뭐 빨래를 어떻게 했을까. 그냥 니가 일 편하게 하려고 내 허락없이 돈 쓴거 아냐 씨발.”

여자는 뭔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꾹 다물었다. 더 말해봤자 화만 돋굴 뿐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표정을 보자 눈꼬리가 더 올라갔다. 남자가 빨래 건조대를 발로 차 넘어트린다. 씨발 이게 진짜 뒤질라고. 여자는 힘없이 넘어진 빨래건조대를 보고 고개를 푹 숙인다.

“죄송합니다.”

여자는 더듬거리지 않고 정확한 발음으로 남자에게 사과했다. 남자는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쓰러진 빨래건조대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일으켜 세워 빨래를 정리했다.

여자는 남자를 처음 봤을 때 살찐 부자 같다고 생각했다. 빌딩숲 사이에서 어려운 서류를 처리하는 한국인의 이미자와는 달랐지만 여자는 농장을 가진 남자니 돈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도 사무실에서는 파리가 날아다녔다. 여자는 남자가 던지는 딱딱한 호구조사에 성실히 답했고, 중개인은 각종 행정 절차에 관련된 일들을 설명했다. 비자나 혼인신고 같은 어려운 단어들이 계속 오갔고 여자는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손만 꼼지락거렸다. 그때도 여자는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할 줄 알았지만, 말이 빨라지거나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남자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할게요 할게.”

별로 맘에 들지는 않지만 가성비가 좋아서 산다는 듯이 남자가 말을 했다. 여자는 자신이 마치 상품이 된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를 쳐다보다 말을 뱉자 중개인이 통역해주었다.

“민식씨는 굉장히 검소한 성격입니다.”

여자는 문득 불안해졌다.

“저도 그래요. 베트남에서도 검소한 생활을 했어요. 고향에 돈 보내는 것 빼고는 별로 돈 들 일이 없을거예요.”

중개인이 통역을 해주자 남자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다시 믹스커피를 먹으려고 보니 파리가 빠져 버둥거리고 있었다. 여자는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그 당시에는 남자가 검소한 성격이라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지만, 여자는 당시 남자가 얼마나 검소한지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검소한 남자는 물세도 아꼈기 때문에 변기통에는 주로 오줌이 차 있었고, 여자가 장을 보면 영수증을 꼼꼼히 살피더니 이건 쓸데없는 소비라며 다시 마트로 돌려보내 환불시키기도 했다. 그 중에선 생리대도 포함이었다. 여자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샀던 면 생리대는 잦은 세탁으로 인해 해졌지만, 여자는 바꿀 생각도 하지 못했다.

5

복도 끝에서 야쿠자들이 튀어나온다. 일본 닌자처럼 허리를 앞으로 숙이고 달려 나오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다들 정장차림이었지만 야쿠자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일본도를 들고 복면을 쓰고 있었다. 야쿠자들이 우마서먼을 포위한다. 우마서먼은 검을 치켜 올리며 싸울 자세를 취한다.

우마서먼이 일본도를 휘두르는 것으로 싸움이 시작된다. 여자는 TV를 보며 과도로 사과를 깎는다. 조금 과장됐다 싶을 정도로 야쿠자들의 가슴팍에서 피가 솟구친다. 야쿠자들은 간단히 쓰러져 나갔다. 여자는 계속해서 사과를 깎는다. 우마 서먼은 칼을 한 번 맞대더니 한 손으로 남자의 눈알을 뽑는다.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남자의 표정이 클로즈업된다. 식칼이 조금 깊게 들어갔는지 껍질에 살이 붙어나온다. 대머리 남자가 우마서먼의 배를 찬다. 우마서먼은 바닥에서 나뒹굴다가 다시 남자의 팔을 벤다. 잘린 팔에서 피가 폭발하듯 튀어나온다. 여자의 얼굴에 사과즙이 튄다. 한 남자가 우마서먼에게 손도끼를 던지지만 그녀는 가볍게 잡아챈다. 그리곤 그에게 되던진다. 남자는 도끼를 머리에 맞고 날아간다. 껍질을 다 벗긴 뒤 깊숙이 사과 안에 과도를 눌러넣는다. 남자들의 팔을 자르고, 몸을 두동강 내고, 배에 칼을 찔러넣는다. 시간이 지나자 건물 안은 남자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팔과 다리를 잘린 남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다. 우마서먼이 어린 남자를 붙잡더니 일본도로 엉덩이를 때린다. 여자는 과도로 사과 한 조각을 집어 먹는다. 입 안에 사과향이 퍼진다.

어느새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 야간 순찰은 없었지만 여자도 이제 그만 잘 시간이었다. 여자는 방안을 둘러본다. 밝은 TV화면을 보다 고개를 돌리니 집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안방에 세워놓은 농장 사진도 보이지 않았고, 담뱃자국이 난 리놀륨 바닥도, 한 쪽이 뜯어진 비키니 옷장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서 자고 있는 남자를 본다. 여자는 정말 사람을 찌를 때 피가 그렇게 분수처럼 튀어나올지 궁굼했다. 남자가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눕는다. 여자는 헉 소리를 내며 TV를 끈다. 깬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가 잠귀가 어두운 것은 여자에겐 탈출구와도 같았다. 베트남에선 TV가 없었기 때문에 여자는 새벽마다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문득 여자는 여동생에게 TV를 사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6

여자가 장화를 신는다. 새벽에 이슬이 껴 장화 밑바닥이 축축했다. 양말이 젖었지만 여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야간 순찰은 한 시간이면 끝나기 때문에 금방 들어와서 씻고 자면 되었다. 자돈사로 걸음을 옮긴다. 가로등이 몇 개 없었기 때문에 밤의 농장은 지독히도 어두웠다. 후레쉬가 없으면 한 발짝도 떼지 못할 정도였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까지도 긴 시간이 걸렸다. 이따금씩 풀숲에서 짐승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눈동자가 빛나는 것만 보였다. 새 한 마리가 호수 근처에서 울고 있다. 호수에선 분뇨 냄새가 났다. 남자는 분뇨처리에 부과되는 세금을 줄이기 위해 조금씩 분뇨를 호수로 흘려보냈다. 그래도 미꾸라지나 개구리는 여름철만 되면 잘만 번식했다. 매년 말랐다가 비가 오면 또 채워지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농장 사람들 이외에는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신고를 한다면 남자뿐만 아니라 농장 직원들 또한 공범으로 조사를 받고, 이후엔 소문이 돌아 다른 농장에 들어가기도 힘들기 때문에 신고를 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여자가 자돈사 문을 연다. 문을 열자마자 덥고 습한 기운이 여자를 덮쳐왔다. 여자는 환풍기를 켠다. 환풍기는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생후 2개월도 안된 자돈들은 여자가 들어오자마자 잠에서 깨 울음 소리를 내었다. 아직 살이 붙지 않은 놈들이라서 움직임도 빨랐다. 여자는 후레쉬를 비추며 자돈들을 살피기 시작한다. 자돈들은 무리를 지으며 여자가 걸어오는 반대편으로 피해다닌다. 여자의 후레쉬가 한 곳에 멈춘다. 자돈 한 마리가 무리와 떨어져 가만히 누워있었다. 여자가 철장의 고임목을 풀고 축사 안으로 들어간다. 여자가 들어가자 자돈들은 울음소리를 내며 최대한 여자와 멀리 떨어졌다. 늘어져 있던 자돈은 여자가 다가오자 그제야 걸음을 옮기려 했다. 여자는 한 손으로 자돈을 들어올리고 후레쉬로 자돈을 비춘다. 자돈이 기운 없이 울부짖는다. 콧잔등과 입천장에 버섯처럼 물집이 잡혀있다. 몇몇 물집은 터져 벌써 고름이 나오고 있었다. 환기를 시키지 않아 자돈사 내에 가스가 가득한데도 물집 냄새는 끔찍했다. 여자는 자돈의 귀 뒤쪽에 항생제를 주사하고 다시 내려놓는다. 돼지는 땅에 발이 닿자마자 무리를 향해 도망갔다. 여자는 남자에게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자돈사를 나간다.
 

7

여자가 숙소에 돌아오니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침을 한 번 삼킨다. 보일러가 돌아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지만 신호음만 들릴 뿐 통화를 할 수는 없었다.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수화기를 꽉 쥔다. 농장에 사람이라고는 여자 한 명 뿐이었다. 여자는 남자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남자는 돌아올 것이었다. 여자는 마치 거미줄에 걸려 먹히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개미처럼 불안하게 숨을 쉬었다. 여자가 서랍에서 콘돔을 꺼낸다.

남자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서였다. 여자는 야생동물처럼 농장으로 들어오는 SUV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쳐다보다 방으로 들어간다. 문을 잠글까 싶었지만 소용 없을 것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며 남자가 들어온다. 여자의 예상대로 남자는 만취한 상태였다. 남자가 밤에 농장을 비우면 술을 먹고 있다는 증거였다. 남자는 매번 만취해서 새벽에 농장에 들어왔고, 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여자는 이미 겪어봐서 알고 있었다. 남자는 빠르게 여자를 향해 다가오더니 여자의 치마를 들춰 올린다. 여자가 남자의 손을 잡고 뿌리치려고 하자 여자는 남자의 뺨을 후려친다.

“씨발년이, 너 나랑 결혼하지 않았냐? 내가 이러면 안돼?”

남자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이불 속에 처박는다. 여자는 비명을 질렀지만 듣는 사람은 남자밖에 없었다. 남자는 거칠게 여자의 팬티를 내리더니 성기를 집어넣는다.

“콘돔! 콘돔!”

여자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쥐고 있던 콘돔을 남자에게 보여준다. 남자는 피식 웃더니 지랄한다, 라고 중얼거리며 거칠게 몸을 움직인다. 여자는 자신의 몸에 뭔가가 들어오는 느낌에 소름이 끼쳤다. 남자는 여자가 저항을 하지 못하게 양 팔을 잡고 있다가, 성기가 작아지면 여자의 뺨을 때렸다. 술을 먹은 탓인지 남자의 성기는 자꾸만 작아졌다. 그럴 때마다 여자가 맞는 횟수도 늘어났다.

“넌 씨발 임마, 느그 고향에서 얼마나 쳐댔으면 넣어도 느낌이 없냐.”

남자가 여자의 머리채를 잡으며 중얼거린다. 여자가 주먹을 꽉 쥐자 팔 위로 가느다란 근육이 솟는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도 남자가 몸을 움직이면 소름이 끼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발버둥 치다가 남자에게 맞고 참기를 반복했다.

날이 밝아도 남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남자를 바라본다. 지독한 술냄새 사이로 향수 냄새가 났다. 남자가 다니는 업소는 노래방처럼 여자를 부르며 놀 수 있는 곳이었지만 섹스는 제한되었다. 섹스는 업소와는 별개로 여자에게 돈을 지불해야했다. 남자가 업소도우미의 주머니에 돈을 꽂아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2차를 가지 않고 숙소로 와서 여자에게 삽입했다. 여자는 처음엔 그런 남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는 남자의 표정을 보고서야 한 가지를 깨달았다. 마치 초등학생 아이가 놀이터에서 천천히 개미들을 죽일 때 짓는 표정과 비슷했다.

여자가 몸을 일으키다 배를 움켜쥔다. 아랫배가 저릿했다. 화장실로 가려는 여자의 발에 뭔가가 밟힌다. 어제 여자가 꺼내놨던 콘돔이었다. 여자는 콘돔을 발로 차 방 한 구석에 밀어 넣는다. 문득 차 소리가 들려 여자가 고개를 든다. 사료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여자는 서둘러 작업복을 입는다.
 

8

“여그 돼지들은 괜찮은가?”

코리나 직원이 농장입구에서 더 들어가지 않고 여자에게 말을 건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엑스표시를 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무슨 말인지는 다 알아들었지만 여자는 한국말을 제대로 못하는 척 해야했다. 농장 직원 이외의 사람들과 말이라도 하면 남자의 눈이 뒤집어졌기 때문이다. 직원은 혀와 코를 번갈아가면서 가리킨다. 문득 여자의 머릿속에서 콧잔등과 입천장에 물집이 난 돼지들이 스친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입을 꾹 다문다. 자칫 안좋은 소문이 난다면 여자는 남자에게 몰매를 맞을 것이었다. 여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요새 뭔 전염병 같은 것이 도는 것 같은디. 옆에 저 도식씨 농장은 죽는 돼지들도 꽤 많이 생겼다더만. 여그도 소독 철저히 하소.”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코리나 직원이 다시 차에 타더니 벌크통 옆에 사료차를 주차시킨다. 남자는 자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가 서명을 했다. 코리나 직원은 서명을 받고 사료차를 작동시켰다.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 안에 있던 사료가 벌크통 안으로 이동한다. 여자는 오늘 일이 끝나는대로 물집에 대해 말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기다란 방수포 두개를 가져다가 모돈사부터 이유자돈사까지 좁은 통로를 만든다. 혹시라도 새끼돼지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길을 만드는 것이다. 허술해보일지는 몰라도 돼지들은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하면 힘을 쓰지 않아 생각보다 몰기 편했다. 통로가 완성되자 여자는 고임목을 풀고 철창을 연다. 나무 판자를 하나 가지고 돼지들을 통로쪽으로 몰기 시작한다.

그 날은 축사이동 날이었다. 새끼돼지들은 생후 1개월까지만 젖을 빨고 이후에는 이유식을 먹여야 했기 때문에, 어미와 떨어트려 놓아야 했다. 모돈사에서 어미와 함께 있던 포유자돈들을 이유자돈사로 옮기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깨우려 했다가 되려 욕만 먹을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아직 출근하지 않아서 여자 혼자라도 일을 시작해야했다. 여자는 나무 판자를 발 끝으로 툭툭치며 계속해서 돼지를 몬다.

새끼돼지 한 마리가 방수포 바깥으로 나간 것은 그때였다. 여자는 이미 새끼돼지의 몸이 절반 이상 방수포를 빠져나갔을 때 그 사실을 알았다. 방수포가 오래되어 찢긴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자가 판자를 한 쪽에 세워놓고 방수포를 넘어가자 새끼돼지는 울음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여자가 전속력으로 뒤쫓았지만 아직 살이 붙지 않은 새끼돼지는 야생동물만큼이나 재빨랐다. 돼지가 여자를 피해 호수 쪽으로 도망간다. 여자는 돼지가 수영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여자는 순간 자신이 돼지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루만에 돼지 시체가 호수에 떠오를 것이고 그것을 본 남자는 다시 여자에게 욕을 할 것이었다. 여자는 자리에 멈춰서서 숨을 고른다.

농장 직원이 돼지를 두 손으로 들어올린다. 여자는 멍하니 농장 직원을 쳐다보다가 앞으로 달려간다. 여자는 농장직원에게 다가가면서 속으로 고맙다는 말을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이 돼지 언제부터 이랬어요?”

직원이 대뜸 사무적인 어투로 여자에게 말을 건다. 여자는 고맙다고 말을 하려다 얼어붙는다. 직원은 돼지의 콧잔등을 손으로 가리키며 계속해서 묻는다. 언제부터 이랬냐구요. 직원의 말투가 다급해진다.

“말, 말하려고…….”

여자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직원은 여자에게 새끼돼지를 건네주더니 사무실로 걸음을 옮긴다. 여자는 멍하니 사무실로 들어가는 직원을 쳐다본다. 돼지가 여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필사적으로 발버둥친다.
 

9

남자는 핏기가 싹 가신 표정을 하고 축사로 내려왔다. 여자에게 축사이동을 중지하라고 말하더니 새끼돼지들의 목 뒤를 집어 들어올린다. 피부가 뒤로 당겨진 새끼돼지들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울었다. 계속해서 돼지들의 얼굴과 입을 확인하던 남자의 손이 굳는다. 아까처럼 물집이 잡힌 돼지가 또 보였다.

“야, 승주야, 너 모돈사랑 A,B육성사 돌면서 이런 돼지들 있나 봐바라. 딴 애들도 지금 다 불러서 확인하라 그래.”

직원이 모돈사로 걸음을 옮긴다. 남자는 새끼돼지를 내려놓더니 여자의 머리채를 잡는다. 여자가 몸을 비틀며 저항하자 멱살을 잡고 흔든다.

“너 저거 봤어 안봤어.”

여자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남자는 여자의 따귀를 때린다. 여자는 마치 새끼돼지처럼 남자의 팔에 붙잡혀 버둥거린다.

“봤어 안봤어. 이래서 가시나들한테 일 맡기면 안된다는 거였는데 씨발.”

남자가 여자의 목을 잡고 세게 조른다. 여자의 얼굴이 금새 붉어진다. 숨을 못쉬자 팔을 쥐고 있던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자의 목을 조르고 있던 남자의 손이 풀린 것은 그때였다. 여자는 이를 질끈 물고 남자의 손아귀를 있는 힘껏 벌린다. 남자는 이년 봐라? 라는 표정으로 손에 힘을 주지만 손아귀는 계속 벌어져갔다. 남자의 얼굴이 거의 여자만큼이나 붉어진다. 남자는 다른 쪽 손을 높게 들어올리자 여자가 다시 움츠러든다. 남자는 여자를 때리려다 농장 입구에서 직원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팔을 내려놓는다. 남자가 여자의 뒤통수를 한 번 치더니 축사로 걸음을 옮긴다. 여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인다. 멀리서 돼지 울음소리가 들렸다.

10

동생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쁠 것 같다고 하더니 정말 바쁜 모양이었다. 여자는 동생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었지만, 이제 그런 상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전화를 받지 않을 때는 새벽에 이슬이 맺히는 것처럼 여자의 마음에도 걱정이 자라났다. 여자는 전화기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농장을 바라본다. 숙소에서는 농장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모든 축사는 주황색 지붕에 판넬 재질이었다. 깔끔한 주황색 지붕을 보면 제대로 관리가 되는 농장 같다가도, 또 농장 주변에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를 보면 관리가 안 되는 듯도 했다. 누가 봐도 농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오히려 공장이라고 말하는게 더 그럴 듯 해 보였다. 남자와 직원들은 가끔 풀숲에 노상방뇨를 했다. 돼지들은 직원들에게 걷어차이기 싫어 순순히 이동하는 듯 보였다. 대부분이 눈빛에 힘이 없고 걷기를 싫어했지만 그것이 값어치를 떨어트리지는 않았다. 분뇨 사이에 돼지 시체를 숨기거나 호수에 똥물을 버리는 것과는 별개로 남자는 매달 빠짐없이 돼지들을 출하했다.

어두워진다. 여자는 시간이 늦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니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다지 덥진 않았지만 습기가 차서 그런지 여자의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생각해보니 일기예보에서 곧 태풍이 온다고 했었다. 또 다시 보수소요가 생긴다고 생각하니 여자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여자는 장화를 벗고 숙소 안으로 들어간다. 씻고 해장국을 만드려면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했다. 땀에 젖은 양말 때문에 여자가 지나간 자리마다 발자국이 생긴다. 벽에 붙어있던 파리들은 여자가 부엌에 들어서자 분주하게 움직인다.

11

전염병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남자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입단속이었다. 정부는 물론 농장에 주기적으로 들리는 사료회사 직원, 근처 농가, 심지어 직원들의 가족들에게 까지 입을 열지 말라고 했다. 남자는 자신이 전염병 신고를 해도 보상금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독은 물론이고 약물 체크리스트를 지키지 않은지도 꽤 됐기 때문이었다.

전염병은 제 모습을 들키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물집이 곰팡이처럼 돼지들의 몸에 퍼지더니, 고열이 뒤따라왔고, 발굽이 떨어졌다. 입천장에 물집이 터진 돼지들은 사료를 먹지 않았다. 항생제도 무용지물이었다. 가끔 면역력이 높은 돼지들은 자연치유가 되기도 했지만 대게 죽었다. 가장 먼저 죽어나간 것은 새끼 돼지들이었다. 면역력이 약한 탓에 바이러스가 몸에 퍼지는 속도가 빨랐다. 분뇨처리장에 들어가는 돼지들이 늘어났다. 새끼돼지들은 일주일을 넘지기 않고 분뇨 속에서 녹았다. 여자는 리어카로 새끼돼지의 시체를 퍼날랐다. 50키로는 거뜬히 드는 여자를 보고 직원들은 남자에게 여자를 사온 것이 맞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전염병이 퍼지는 것과 남자의 노력은 별개의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비밀리에 자신이 잘 아는 수의사를 한 명 데려왔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구제역이었다. 자연치료는 가능했지만 그것은 면역력이 높은 돼지들이나 해당하는 것이고, 남자의 돼지들은 그렇지 않았다. 수의사는 신고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고 말했지만 남자는 수의사에게 돈을 더 쥐어준 채 돌려보냈다. 그날은 직원들도 남자에게 선뜻 말을 걸지 못했다.

여자가 온 뒤로 매달 있던 출하가 취소되었다. 그 말은 즉 지출만 있고 수입은 없단 뜻이었다. 더군다나 약을 사느라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은 돈이 나갔다. 남자는 농장 입구에 철조망을 치고 출입 금지 판넬을 쳤다. 농장에 들어오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염병이 옮을까봐 그런 것이라고 둘러댔다. 직원들은 이래봤자 사람들이 아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조언을 했지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낮에는 입을 굳게 닫고 일만 했고, 밤에는 어디론가 사라져 새벽에 들어왔다. 술에 취해 들어오는 횟수가 늘었다. 아예 밖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왔는지 예전처럼 여자에게 손대지는 않았다. 대신 평소에 여자를 때리는 일이 잦았다. 마치 모든 일의 원흉이 여자 때문이라는 듯 리어카를 끌고 가는 여자에게 발길질을 하기도 했고, 담배꽁초를 여자에게 던지기도 했다. 여자는 마치 축사이동을 하는 돼지처럼 남자를 보면 고개를 푹 숙였다.
 

12

“돈, 안들어왔어요. 왜.”

여자가 남자에게 말을 건다. 동생에게 전화가 온 것은 며칠 전이었다. 이번 달에 동생에게 들어가야 했을 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동생에게 TV를 사라고 말하려던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왜 돈을 보내주지 않는지는 알았지만 여자는 한 번이라도 말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일을 마친 후 남자가 술집에 가기 전 말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없어, 돈. 기다려.”

남자는 간결하게 대답한다. 술집에 가기 전이라 기분이 좋은 것인지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지는 않았다. 여자는 침을 꼴깍 삼키며 한 번 더 말한다.

“돈 없다면서 술은 마셔요.”

남자는 신발을 신다 여자의 뒤통수를 갈긴다. 미친년이 많이 컸네, 문이 닫히고 여자만 덩그러니 서있다.

파리들이 윙윙거리며 돌아다닌다. 여자는 요새 파리들이 늘어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여자는 파리채를 집어 든다. 냉장고 벽면에 파리가 붙어있다. 평평한 곳이라 파리채를 휘두르기에도 좋았다. 여자가 파리채를 내려찍자 빨간색 피와 내장이 묻어나온다. 놀란 파리들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천장에 달라붙는다. 여자는 에프킬라를 뿌린다. 남자가 부엌에서 뿌리지 말라고 했었지만 그는 새벽에 만취한 상태로 들어올 것이라 상관없었다. 파리들은 힘없이 날아다니다 떨어지거나, 끈끈이 테이프에 붙는다. 바닥에 떨어진 파리들은 배를 보인채 미친듯이 다리를 버둥거린다. 여자는 멍하니 떨어진 파리를 보더니, 발뒤꿈치로 천천히 파리를 밟는다. 까득-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터지는 느낌이 든다. 여자의 발 뒤꿈치에 파리의 내장이 묻는다. 여자는 계속해서 파리채를 휘두른다.

13

남자가 돌아온 것은 새벽 세시를 넘긴 후였다. 평소보다 더 늦었고 또 평소보다 더 취한 상태였다. 여자는 방에서 TV를 보다 현관으로 나갔다. 남자가 시뻘개진 얼굴로 여자를 노려보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어깨를 붙잡고 부축한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던진다. 책상 모서리에 광대뼈를 박은 여자는 얼굴을 붙잡고 뒹군다. 책상 위에 세워져 있던 화분이 바닥에 떨어져 깨진다. 남자는 다시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안방으로 향한다.

“니 년 때문에, 씨발 니 년 때문이야…….”

여자가 비명을 지르거나 반항하면 잠깐 멈춰 따귀를 때리고, 얌전해지면 다시 움직였다. 어차피 듣는 사람은 남자밖에 없었다. 남자는 안방 문을 열고 여자를 다시 집어던진다. 여자는 맥없이 바닥에 나뒹군다. 남자가 바지춤을 풀며 다가오자 여자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바지를 꽉 붙잡는다. 남자는 계속해서 니 년 때문에…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남자가 다가오자 여자는 고개를 내저으며 뒷걸음질쳤지만 이내 벽에 막혔다. 남자가 여자의 바지와 팬티를 동시에 내린다. 여자가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내자 남자는 여자의 명치를 세게 친다. 여자가 컥컥거리더니 이내 얌전해진다.

남자가 여자를 뒤로 돌리더니 안으로 들어온다. 거칠게 몸을 앞뒤로 움직인다. 여자의 초점이 흐려진다. 흰색 벽지에 파리똥이 점점이 박혀있다. 언제 들어왔는지 창틀에 거미줄이 걸려있다. 여자는 거미가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느꼈다. 부엌에서 들어온 파리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과 아랫배의 통증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일정한 박자로 허리를 흔든다. 여자의 엉덩이 위로 남자의 땀이 떨어진다. 씨발, 욕을 내뱉은 것은 여자였다. 여자는 문득 지금까지 분뇨처리장에 묻어놓은 돼지들이 어떻게 됐을지 궁금했다. 오늘도 돼지가 죽을 것이었다. 여자는 내일도 돼지 시체를 분뇨처리장에 갖다 놓고, 남자가 효과도 없는 항생제를 주사하는 것을 보고, 파리를 잡고, 부엌에서 요리를 할 것이었다. 여자가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

거미줄에 파리가 걸린 것은 그때였다. 우마서먼이 파리채를 휘두르자 남자의 성기가 잘려나갔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사타구니를 움켜쥔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흰 벽에 스프레이처럼 흩뿌려진다. 우마서먼이 몸을 일으켜 자세를 고쳐 잡더니 다시 파리채로 남자를 겨눈다. 남자는 미친 듯이 욕설을 내뱉으며 우마서먼에게 달려든다. 남자가 세게 우마서먼의 목을 움켜쥐었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남자의 팔을 양 옆으로 벌렸다. 우마서먼의 팔에 선명한 근육이 솟는다. 남자의 팔이 점점 벌어지더니 우마서먼의 숨통이 트인다. 우마서먼이 발을 걸어 남자를 넘어뜨리더니 남자의 위로 올라탄다. 양 팔을 무릎으로 누르고 남자의 얼굴에 주먹질을 한다. 코와 입에서 피가 터진다.

남자가 정신을 잃을 때쯤에서야 우마서먼이 주먹질을 멈췄다. 뼈가 부러졌는지 우마서먼의 손이 벌벌 떨린다. 남자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에 범벅이 되어 있었다. 우마서먼이 숨을 고른다. 숨이 잦아들자 우마서먼이 천천히, 파리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짧고 간결한 동작으로 남자의 목을 찌른다.
 

14

비가 온다. 태풍이 북상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비 때문에 저수지가 뒤집어져 밑에 가라앉아 있던 똥물이 올라왔다. 흙탕물처럼 지저분한 색이었다. 벌거벗은 남자 위로도 비가 세차게 떨어진다. 여자가 남자의 입에 빠루를 집어넣는다. 돼지보다 입이 작아서 그런지 잘 들어가지 않았다. 여자가 과도로 남자의 입 양쪽을 찢더니 세게 벌린다. 부욱-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입이 크게 벌어진다. 여자는 남자의 입천장에 빠루를 박아넣는다. 끌고 갈 때 빠질까봐 있는 힘껏 박는다. 빠루는 입천장을 통과해 머리를 뚫을 정도로 깊게 박힌다. 여자는 빠루를 고쳐 잡고 남자를 끌고 간다.

남자는 모돈보다 가벼웠기 때문에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도 끌 수 있었다. 땀 대신 비를 흠뻑 뒤집어 쓴 여자는 멈추지 않고 분뇨처리장으로 향한다. 문득 여자는 동생이 궁금했지만 핸드폰을 집 안에 두고 나와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잘 지내기를 바랬다.

여자는 남자의 말대로 분뇨처리장 깊숙이 들어간다. 가장 깊은 곳에 묻어야 금방 썩었다. 여자는 속으로 더, 더, 더, 들어가야 한다고 외쳤다. 분뇨처리장의 끝에 도착한 여자는 빠루를 놓고 분뇨 더미를 파기 시작한다. 남자 하나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만들어지자 여자는 빠루를 빼고 남자를 두 손으로 들어올린다. 남자는 눈동자 위로 파리가 올라와 앉는다. 여자는 남자를 구멍에 넣고 분뇨를 덮는다. 바람이 많이 부는 탓인지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남자가 흘린 피가 빗방울을 타고 흐르더니 저수지에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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