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부문 우수상] 우리는 무엇을 외쳐야 하는가
[2017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부문 우수상] 우리는 무엇을 외쳐야 하는가
  • 안상환<인문대 중어중문학과 12> 군
  • 승인 2017.12.03
  • 호수 1469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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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말이지, 창문은 하나도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는 철(鐵)로 만든 방이 있다고 치세. 그리고 말이지,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다고 하세. 이제 곧 다들 질식해 죽겠지. 하지만 혼수상태에서 바로 죽음에 이를 테니까 절대로 죽기 전의 슬픔 따위는 못 느낄 거야.

근데 자네가 지금 큰 소리를 질러서 비교적 정신이 맑은 몇 사람을 깨운다면 말이지, 이 소수의 불행한 사람들은 임종(臨終)하는 순간의 헤어날 수 없는 고초를 다 받아야 되지 않겠나? 그러고서도 자네, 그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없겠나?”

“하지만 기왕에 몇 사람이 깨어났다면, 그 철로 만든 방을 부술 수 있는 희망이 절대로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나?”1)

루쉰(魯迅: 1881~1936)은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이다. 1918년 그는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인〈광인일기(狂人日記)〉를 잡지 <신청년(新靑年)>에 발표한 것을 필두로 하여 1935년까지 모두 33편의 단편소설을 창작하였고, <외침(吶喊)>과 <방황(彷徨)>、<고사신편(故事新編)>등, 총 세 권의 소설집을 출간했다. 나는 그의 여러 작품을 중심으로 루쉰이 가지고 있던 사상, 그리고 그것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의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5․4 운동 시기의 루쉰의 사상과 내적갈등이 잘 드러나 있는 이 서문은 그의 첫 번째 소설집 <외침>에 수록되어 있다. 이 서문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말하는 적막이 무엇인지, 그가 어떠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 대해 어떠한 해답을 그려냈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이곳은 창문도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는 곳이다. 부수기는커녕 사람들을 깨우는 것조차 벅차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하지만 화자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바위는 죽은 것이지만 계란은 살아서 바위를 넘는다.” 라는 모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대사처럼 루쉰은 잠들어 있는 그들에게 간절한 외침을 설파할 것을 주장한다. 그 외침을 무엇을 부르는 것일까? 우리에게도 아직 그 외침은 유효한가?

루쉰이 말하는 외침이란 <광인일기>에서도 나온다. <광인일기>에서 루쉰은 주인공이 피해망상증을 앓기 시작하면서 그 증상이 최고조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을 일기 형식으로 써나가는데, 주인공은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한다는 망상에 빠져있다. 이것은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심각한 진실을 담고 있는데, 1911년 신해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당시 뿌리깊게 남아있던 봉건 유교사회의 질서를 보고 이를 식인 사회로 비유한 것이다. 이러한 봉건 유교사회의 잔재 아래 갇혀있는 민중에 대한 외침, 이것은 곧 계몽인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가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치료에 의해 돌아가시고 루쉰은 의사를 꿈꿨다. 과학적인 서양 의학 기술을 배워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와 같이 허무하게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어느 날 강의를 듣던 중 보게 된 한 필름이 그의 일생일대를 뒤집어놓는다. 필름 안에는 수많은 중국인 군중들이 서 있었고, 한 사람이 묶여있었다. 러시아 군의 첩자 노릇을 하여 일본군이 본보기로 목을 치려는 장면이었는데 주변의 건장한 중국인들은 동족을 도와주기는커녕 정신이 마비되어 있는 듯 보였다. 그 후 루쉰은 시급한 당면과제는 의학이 아닌 자국민의 정신을 개조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써 그는 ‘문예’를 택하였다.

사회 구조 변혁을 위해선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들의 본성에 대한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탐구가 필요한데 그 중 매슬로(Maslow)의 욕구단계이론을 참고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기본적인 생리적인 욕구, 안정의 욕구가 충족되고 난 이후에 좀 더 큰 사회나 자아문제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때문에 당시 당장 의식주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던 대다수의 민중에게 루쉰의 외침은 호소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한데 그러한 민중에게 문예란 사치에 불과하며 봉건적인 잔재를 청산하느니 정신 개혁을 하느니 등의 문제는 저 강 건너편의 이야기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외침은 적막 속에서 외로이 메아리쳤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들을 이끌어야 할까? 언제 이들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있고 사회 변혁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하며 매 순간 좌절하고 또 다시 일어섰을 그의 고뇌는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다.

일찍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료함’을 느끼게 된 것은 그 후부터였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훗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주장이 누군가의 찬성과 지지를 얻게 되면 더욱 가속(加速) 전진(前進)할 수 있는 법이며, 상대방이 반대한다손 치더라도 더욱 분투하고 노력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법 아니던가! 그러나 낯선 사람들 가운데서 혼자 아무리 외쳐도 그들이 찬성도 반대도 없이 아무런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 데야 어찌하랴! 막막한 황야에 홀로 서 있을 때처럼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나 큰 슬픔인가! 그래서 나는 그 느낌을 ‘적막(寂寞)’이라 하였다. 이 ‘적막’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커다란 독사처럼 내 영혼을 칭칭 휘감아 버렸다. 그러나 비록 이 까닭 없는 비애를 지니고는 있었지만, 그 때문에 분노하지는 않았다. 그 경험은 나 자신을 반성하게 하였고,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끔 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나는 팔 한번 휘두르면 호응하는 군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그런 영웅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나 자신의 ‘적막’ 만은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2)

그러면 이러한 루쉰의 고민은 과거형으로만 남은 것 일까? 현재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선 대외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떠한 운명에 처해 있는가? 작년 최순실 관련사건과 사드문제 등으로 나라가 안팎으로 시끄러웠다. 국정이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자 미국과 중국, 일본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우리의 목줄을 이리저리 뒤흔들었다. 소국의 필연인 것 인지는 몰라도 작금의 양태는 중기 후금과 명, 말기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껴서 강국의 세력 다툼에 희생양이 되었던 옛 조선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최근 개봉된 ‘남한산성‘을 보면서 느낀 것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본질적으로 같은 상황에 쳐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내의 봉건적 잔재는 타파되었는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사회가 도래하였는가? 박근혜, 최순실 사건은 21세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사회에 아직도 불합리와 모순이 뿌리 깊게 박혀 있음을 알린 경종(警鐘)이었다. 고개를 돌려 가까운 중국을 보자. 중국 공산당이 인민을 해방시켰다고 하지만 당 국가체제(party state)인 중국의 모든 인민들이 근본적인 해방을 얻었는가?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중국정부는 사회에 대한 내부 통제력을 강화하고 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자유의 근본적 제한과 철저한 감시를 하고 있으며, 대규모 무장경찰력을 유지하고, 인터넷의 선별적 허용과 통제·차단 매커니즘을 운용하고 있다. 독립에 대한 반대와 억제는 강경하게 나가고 있으며 동북공정, 서남공정, 서북공정 등 역사왜곡과 선전을 통해 ‘강한 중국’, ‘위대한 중국’ 건설을 위한 애국적 민족주의를 조장하고 있다. 또한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서부대개발과 농촌경제 활성화정책을 통해 심각한 양극화로 발생한 인민의 불만을 잠재우려 하고 있다. 물론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펼친 관치주도형 금융제도라든지, 국가 발전 정책은 지금의 G2 중국을 만들었으나, 그러나 그 이면에는 2억5천명에 달하는 농민공들의 희생, 부정부패 등의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루쉰의 작품 속 주제가 당시 중국의 시대 상황뿐만 아니라 현재의 중국,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크고 보편적인 의의와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봉건 유교사회, 지주계급, 체제 속에서 순응하고 당하는 무지한 민중, 사람의 의식을 통제하고 좀 먹는 대중매체, 극심한 이기주의, 마녀사냥, 열강의 간섭 등은 중국이든 한국이든, 옛날이든 지금이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아직도 사회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이 지금 21세기의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이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앞에서 말한 루쉰의 철방 이야기는 영화 <매트릭스>를 연상케 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주인공에게 빨간약과 파란 약을 들이대며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장면이 있다. 빨간 약을 먹으면 진실을 볼 수 있고, 파란 약을 먹으면 매트릭스 속에서 진실을 모른 채 현실에 안주하며 살 수 있다. 매트릭스 밖의 현실은 아름답지도, 편안하지도 않다. 정상적인 의식주가 어렵고 끝없이 힘든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진실이 있으며 한 줄기일지언정 그 진실 속에서 희망을 가져 볼 수 있다. 물론 사람들에게 진실의 빨간 약을 권하고, 철방에서 잠들어 있는 이들을 깨우는 데에는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항상 우리 사회에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와 진실을 추구했던 선각자들의 운명은 항상 고달팠다. 아직 대중이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깨운 뒤 이끌고 가려하니 선각자들의 사명은 그만큼 고되고 아프다. 종교개혁을 말할 때, 사람들은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은 잘 알지만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던 츠빙글리(1484~1531)의 이름은 다소 낯설게 다가온다. 보통 선각자들은 다음 따라올 사람들을 위한 길을 외롭게 혼자 개척해 나간다. 혹자는 “혁명이 성공하더라도 고인 물은 썩듯이 그 혁명을 이끈 세력이 기득권층으로 둔갑하여 부패하고 결국 역사는 계속 이렇게 반복의 톱니바퀴일 뿐이다. 단지 사회구조의 겉 형식만 바뀔 뿐,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는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고 불합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봉건 사회를 부정하여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부르주아지 계급들도, 공산혁명을 주장하여 성공한 모택동과 공산당도 결국 역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라고 말하며 진리와 진실을 찾아가는 그 위대한 과정에 찬물을 끼얹는다. 결국 우리는 제자리걸음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쉰이 외쳤던 것은,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바로 현재는 과거와 조금씩 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촛불 집회의 승리와 평화적 정권 교체는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있음을 보여주었다. 어두운 절망 속을 불빛으로 가득 채워 적막을 깼던 촛불혁명은 우리들의 민주정신이 꽃을 피우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상실의 시대에서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 그리고 그 외침에 대한 당위성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고 나아가야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수냐 진보냐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색을 배제한 인간다운 삶,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삶을 뜻한다. “원래 땅 위에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 걸어갔고 그 뒤를 따라 걷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그것이 바로 길이 되었다.” 라는 루쉰의 말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외침에 경청하고 그것이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는 길이라면 함께 그 길을 걸어 철방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인류 역사는 때론 멈추었고 퇴보의 길로 돌아간 적도 있었지만 결국 큰 그림을 보면 우리는 앞을 향해 달려왔다. 루쉰과 같은 선각자들이 말한 세상은 추상적이고 보장되지 않는 미래이다. 하지만 그 허상에 불과한 희망조차 없다면 우리는 영영 진실과 진리에 다가설 수 없다. 추상의 모습으로 숨어 있는 진리와 미래의 허구를 난타하여 얻은 것이 고작 루쉰이 말한 심연의 적막일지라도 우리는 다시 눈물을 머금고 적막으로부터 이 사실을 되새긴 채로 일어서야 한다. 희망은 곧 땅 위의 길이며 그것은 우리의 한 걸음 용기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1)루쉰, 「외침」, 그린비, 2011, <서문> 中
2)루쉰, 「외침」, 그린비, 2011, <서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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