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빛으로 세계를 아우르다, 국제회의 통역사 최현진
은은한 빛으로 세계를 아우르다, 국제회의 통역사 최현진
  • 이화랑 기자
  • 승인 2017.10.30
  • 호수 1465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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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통역사는 ‘물 위의 백조’로 불린다. 수면 위에서는 우아한 자태를 보이지만 물속에서는 끊임없이 발을 휘젓는 백조처럼 그 한 순간을 위해 누구보다 철저한 준비와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교 영미언어문화학과(01)를 졸업한 최현진 한영 국제회의 통역사(이하 최 통역사)는 특유의 대담함과 열정으로 미국 대선 토론에서 동시통역을 진행하는 등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영어와 한국어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최 통역사. 그녀에게 통역사로서의 삶과 목표에 대해 들어봤다.

성공의 발판이 된 도전정신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최 통역사는 학교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입시를 앞두고 진행한 면담에서, 그녀의 담임이 그녀에게 “너는 이번 해엔 대학에 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한 것이다. 5년간 캐나다 유학을 다녀온 그녀가 현실적으로 한국의 입시제도에 적응하기 힘들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다. “부정적인 얘기를 들으니 더 의욕이 불타올랐어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못 견뎌 하는 성격이라, 저 자신을 한계에 밀어붙이면서까지 최선을 다했던 것 같아요.” 끝끝내 그녀는 ‘영어’라는 자신의 강점과 각고의 노력으로 본교 영미언어문화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 회의장 한 편에 자리한 어두운 부스 안에서 동시통역을 하고 있는 최 통역사의 모습이다. 그녀는 앞에 나서서 화려한 조명을 받지는 않지만, 목소리로서 은은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구체적인 진로를 고민하던 최 통역사는 학과 교수님께 진로 상담을 받았다. 교수님은 그녀에게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고, 가장 자신 있는 것이 영어였던 그녀는 ‘영어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그녀에게 통번역대학원 진학을 권유하며 입학 시험지를 건넸다. 외국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이미 영어가 수준급인 그녀였지만, 시험지 속 영어는 그녀에게조차 너무 어렵게 다가왔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녀의 도전정신을 북돋웠다. “시험지를 딱 보자마자 ‘전혀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자체로 아무나 할 수 없는 분야라는 생각이 들었고, 통역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었어요”라며 “결론적으로 ‘통역사의 길을 걸어보자’는 결심을 굳히게 됐죠”라고 말했다.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하며 2년 동안은 직장 생활을 하기도 한 그녀지만, ‘통역’이 가진 매력은 쉽게 버릴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다시 통번역대학원에 진학에 도전했고, 성공해 통역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힐러리를 대표하는 한국의 목소리가 되다
2010년부터 전문 통역사로 활동 중인 최 통역사는 작년 ‘한-EU FTA 무역위원회 회의’, ‘아세안+3 정보장관회의’, 올해 ‘OECD 국제교통포럼’ 등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주요 국제회의에서 통역사로 활약했다. 국제회의 통역은 대부분 추천을 통해 직책이 주어지기에, 이런 화려한 통역 이력은 그녀의 통역 수행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통역 시장은 냉정하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훌륭히 수행할 경우 연속적인 기회들이 찾아오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 통역 시장은 그만큼 철저하게 실력이 중요하다.

최 통역사는 작년 미국 대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대통령 후보 토론회를 비롯해 올해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생중계 동시통역을 맡았다. 특히 미 대선 토론 생중계 동시통역 경험은 그녀가 주목을 받게 된 계기이자 그녀의 커리어를 완전히 바꿔놓은 사건이다. 동시통역은 그 특성상 앞으로 어떤 얘기가 나올지,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생방송 TV토론은 방송 이후 대선 흐름에 크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최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야 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부담이 컸던 그녀였다. “모두가 집중하고 있는 토론이다 보니 신중에 신중을 기했어요. 실제로 제가 통역했던 문구가 그대로 다음 날 아침 신문에 나오기도 했죠.”

그녀는 통역사에겐 집중력과 순발력 모든 게 필수적이라면서, 이를 함양할 수 있는 방법은 ‘연습’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동시통역은 마치 파도타기를 하는 것과 비슷해요. 그 흐름만 잘 탄다면 매우 순조롭게 통역할 수 있습니다.”

▲ 최 통역사는 수많은 국내외 VIP 통역을 맡아왔다. 지르키 카타이넨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왼쪽)과 황교안 전 국무총리(오른쪽)의 면담에 참여해 지르키 부위원장의 옆에서 통역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Preparation is everything"
최 통역사가 다루는 통역 영어는 가장 고급수준의 영어다. 대통령이 연설할 때나 아나운서들이 뉴스를 진행할 때 사용하는 언어처럼 공식적인 자리에서 다뤄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맡은 통역 주제에 대한 전문지식을 쌓기 위해 거의 모든 시간을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공부에 쏟는다. “사실 실용 영어는 제일 쉬운 단어로, 제일 짧게 표현해서 자신의 의사를 드러낼 수 있으면 충분해요. 어렵게 하면 오히려 소통이 힘들어지곤 하죠. 반면에 통역 영어는 특정 분야에 대해 전문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심도 있는 공부가 필요해요.”

최 통역사는 국제회의 통역사로서 공부하며 수천, 수만 개의 연설을 통·번역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책을 내기도 했다. 작년 말 한 출판사로부터 ‘오바마 대통령 연설문 번역서를 함께 작업해보자’는 제안을 받은 그녀는, 오바마 대통령의 섬세한 표현과 그 속에 담긴 진심을 한국어로 온전히 전달해보고 싶다는 일념 하에 다시 한번 도전을 결심했다. 최 통역사는 대통령의 글이라는 것, 결과물이 ‘책’이라는 출판물로 남는다는 것에 책임감을 느꼈다. “제일 신경 썼던 부분은 영어도 아닌 한국어였어요. 미국 대통령이지만 한국 국민들이 봤을 때 그 느낌을 그대로 받을 수 있도록 조사 하나, 접속사 하나에도 고민을 거듭했죠.” 그렇게 1년간의 꼼꼼한 준비 과정을 거쳐 지난 8월 출간한 그녀의 첫 역서 「대통령의 연설」은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하며 많은 이들의 관심을 얻었다.

최 통역사는 현재 본교 PRIME 사업 산업연계 교육 자문위원회(IAB) 위원으로도 활동하며 취업을 앞둔 후배들에게 조언을 건네고 있다. 작년 통번역대학원에서 순차 통역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던 그녀는 후에 모교인 한양대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말한다. 최 통역사는 인터뷰를 끝낼 무렵 장차 우리나라 대통령의 전담 통역사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Preparation is everything”은 최 통역사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다. 철저한 준비를 강조한 최 통역사는 ‘Fail to prepare, Prepare to fail’, 즉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사는 그녀는 이미 준비된 ‘으뜸’ 통역사였다.

▲ ‘카르페디엠’이란 ‘현재를 잡아라’로 번역되는 라틴어로,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최 통역사는 지금 이 순간의 낭만을 충분히 즐기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신민경 수습기자 medsom02@hanyang.ac.kr
사진 제공: 최현진 통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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