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 김성재 기자
  • 승인 2017.05.20
  • 호수 14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늘에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이는 베트남 빈호아 마을에 세워져 있는 증오비에 적힌 문구다. 증오비에서 말하는 ‘하늘에 닿을 죄악’은 무엇일까. 또 이토록 기억하고자 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베트남 전쟁 속 민간인 학살, 한국군이 자행했을까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이 학살을 자행했다고 주장되는 사건은 크게 △퐁니·퐁넛 마을 사건 △고자이 마을 사건 △빈호아·하미 마을 사건이 있다.
먼저, 퐁니·퐁넛 마을 사건은 1968년 2월 12일 마을을 지나던 한국군 청룡 부대 1중대가 마을의 민간인 74 명을 학살한 것으로, 국제사회에서 논란이 됐다. 이 사건에 대해 미군 상병 제이 본 씨의 증언을 토대로 한 미군 보고서가 한국군의 학살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2000년에 발촉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는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 보고서를 근거로 한국군의 학살을 주장했다. 참전 당시의 참전군인과 해당 마을의 생존자들의 증언도 근거로 작용한다. 퐁니·퐁넛 마을 학살사건의 생존자 응우옌 티 엔 씨는 “평온한 마을에 한국 군인이 들이닥쳐 학살을 자행했어요. 모든 게 재앙이었죠”라고 증언했다. 당시 한국군의 기록은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아니다”며 부정하고 있다. 
다음으로 1966년 2월 26일 베트남 빈딘 성의 고자이 마을 주민 380여 명이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논란이 된 고자이 마을 사건은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하지만 이는 근거가 부족한 과장보도로 밝혀졌고 생존자 증언만 신빙성을 얻었다. 과장보도와 부족한 근거는 한국군 학살 사실을 부정하는 입장에 힘을 실어주게 됐다. 이에 베트남 출신이자 한국에서 인권활동가로 활동하는 레 황 응언 씨(이하 레 씨)는 “고자이 학살의 경우, 증언뿐만 아니라 조사가 많이 이뤄졌고 베트남 빈딘 성의 박물관에는 한국군 학살의 증거가 많이 있다”며 학살을 부정하는 입장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빈호아·하미 마을 사건 역시 한국군이 학살을 자행했다고 하지만 이 역시 단정 짓기는 어렵다. 당시 베트남 전장은 남베트남군, 북베트남군, 미군, 한국군을 비롯한 연합군, 소수 민족군, 민병대들이 얽히고설킨 전장이었다. 서로의 군복으로 위장해 학살을 자행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남베트남군 장교로 복무한 응우옌 공 루안 씨는 “미군이나 한국군이 전쟁범죄나 강간을 저질렀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대부분 근거가 없는 사실이었다”며 “오히려 베트콩의 선전인 경우가 많았다”고 언급했다. 그렇지만 베트남전을 시찰한 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 씨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포로학살이 빈번했고 베트남 농민은 베트콩보다 한국군을 더 무서워했다”는 기록이 있어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아니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 전쟁기념관에 세워진 월남 참전 기념탑

 

‘학살’과 ‘전쟁’ 기억의 차이
베트남은 전쟁이 끝나고 국가적으로 전쟁 범죄 증거들을 수집하고 조사했다. 전쟁증적박물관을 설립해 미국과 한국에 의한 학살 증거를 수집·공개했다. 또한 국가·민간 차원에서, 학살이 자행된 마을에 증오비와 위령비를 세웠고 학살에 대한 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마을 사람들은 학살내용을 자장가로 만들어 이후 세대에게 전해왔다. 여러 베트남 시민단체, 언론, 국제 NGO단체는 베트남 학살을 대외적으로 공론화해왔다.
마찬가지로 한국도 베트남 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아니 ‘기념’하고 있다. 한국은 전쟁기념관과 월남 참전 기념탑(기념비)을 전국 곳곳에 세워 참전군인의 용기와 희생을 추앙한다. 기념탑은 2014년 국내 기준 150~200개이다. 한국 전쟁기념관과 기념탑에는 △국가경제발전의 초석△반공주의△세계평화△애국주의△자유 수호의 이념적 가치를 내세우고, 지역 및 부대별 참전군인명을 새겨 집단성을 과시하고 있다. 역사 교육에 있어서도 베트남 전쟁은 한국의 경제적 이익에 기여했다는 부분만 서술된다.
이런 한국과 베트남의 차이에 대해 레 씨는 “한국에서의 베트남 전쟁은 정치적 이유, 반공과 미국과의 관계 영향을 고려해 경제적 이익과 전쟁의 성과에만 초점을 맞추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당시 월남 참전 군인들에 영웅화하는 것으로 참전에 대한 국가적 배상과 대우를 대신했고 참전군인의 희생을 합리화한 측면이 있다”고 전했다. 

 

▲ 베트남 전쟁 중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잊지 않기 위해 베트남 곳곳에는 증오비와 위령비가 세워져있다.

 

베트남 전쟁 학살 논란, 앞으로 나아가다
베트남 전쟁 학살 논란은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첫째, 모든 참전 군인들이 학살에 가담했거나 전쟁범죄자라는 식의 논리는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전군인들 역시 고엽제와 정신적 외상, 자의가 아닌 국가에 의한 전쟁참여라는 점에서 또 다른 피해자다.
둘째, 학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있다. 1992년 한국과 베트남 수교 당시 김대중 정부는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졌다며 애도의 뜻과 사죄를 표한 반면 베트남 정부는 “과거사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니, 경제적인 협력을 바란다”고 밝히며 일단락시켰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과는 다르게 수많은 전쟁피해자들이 존재하며 국가적인 차원의 사과와 보상은 미흡하다. 따라서 이 학살 논란은 해결해야 할 현재 진행형 과제로 남아있다. 
셋째, 과거사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박근혜 정부가 학살 논란에 대해 사과하지 않은 것을 베트남 정부가 문제 삼지 않자 일본 우익계 신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베트남이 성숙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며 압박했다. 한국 역시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 연연해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처럼 베트남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돌아오는 화살이 될 수 있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사죄를 당당히 요구하기 위해 우리도 역사와 관련된 논란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논란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했다. 정확한 근거가 밝혀지지 않아 어느 한쪽의 시각으로 사건을 해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살의 가능성이 존재하고 학살 논란과 오해를 받는 부분이 있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진상규명을 위해 앞장서야 한다. 또한 실제로 학살이 자행됐음이 드러나면 피해자 보상과 진정한 의미의 용서와 사죄를 구하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사건, 두 개의 기억으로 남은 베트남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도움: 박다함 기자 ojree@hanyang.ac.kr
      베트남 시민운동가 레 황 응언 씨
참고문헌:한겨레21. 끝없이 벗겨지는 '제2의밀라이’.
2000.11.15.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1036.html.2017.05.16
고경태.1968년 2월 12일.한겨레출판사.2015.02.12
아사히신문.베트남의 과거사 대처 방법.2013.12.06.
송필경.베트남평화의료연대
http://medipeace.cafe24.com/zbxe/index.php?document_srl=68462&mid=freeboard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