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문화산책
5월의 문화산책
  • 이태성 기자 외
  • 승인 2017.05.13
  • 호수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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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적인 미세먼지가 봄나들이를 떠나려는 우리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그러나 여의도나 서울숲으로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문화면에서는 바깥보다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실내 문화 공간 다섯 곳을 소개한다. 

더 이상 살아있는 게 아니야  연극「킬 미 나우」

▲ 연극 「킬 미 나우」의 한 장면

유명 소설가 제이크는 지체장애를 가진 아들 조이를 위해 생업인 글쓰기마저 포기하고 양육에 헌신하고 있다. 위태롭지만 행복하게 이어오던 둘의 관계는 성인이 된 조이가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선언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제이크마저 오랜 병간호로 인해 건강이 나빠지고, 극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킬 미 나우」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에 관한 연극이다. 극의 전반부는 사랑 받을 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조이는 장애 때문에 평범한 연애를 하지 못한다. 주변 여성들에게 괴물이라고 손가락질까지 받는다. 장애인을 가장 가까이서 돌봐야 할 복지 기관조차 그의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다. 단순한 욕구 불만으로 단정 짓고 성욕을 처리해주는 기계나 직원을 파견하면 되지 않겠냐 제안할 뿐이다. 애정을 박탈당한 사람은 조이뿐만이 아니다. 제이크도 조이에게 헌신하느라 연애나 재혼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한편 극의 후반부는 존엄한 죽음을 맞을 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명을 소중히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개개인의 처지에 대해 무관심할 때, 어떻게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돋보인다. 작품은 난치병 환자들이 겪는 고통을 잔인할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한다. 안타깝게도 제이크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권리를 복지 기관이나 기존의 법질서는 불용한다.
「킬 미 나우」를 특별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지점은 장애 가정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극은 장애 가정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이 부자가 처한 열악한 환경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백미는 제이크가 욕조 속 조이의 욕구를 대신 해소해주는 장면이다. “이 손은 조이 손이야. 아빠는 없어”란 제이크의 대사가 끝나고, 무대는 암전된다. 물속에서 만들어지는 철퍽거리는 소리만이 점점 커지며 공연장을 채운다. 이처럼 관객들은 상영시간 내내 조이 부자가 처한 잔인한 현실을 함께 견뎌내야 한다. “보통의 가정이라는 거 축복이야”란 제이크의 대사가 무겁게 들리는 이유다.
연극은 우리 사회가 미처 살피지 못한 장애 가정의 어려움을 몸소 느끼게 해준다. 「킬 미 나우」는 2014년 발표된 동명의 캐나다 연극을 원작으로 한다. 대표적 복지 선진국인 캐나다 사회가 약자들을 바라보는 세심한 시선은 우리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준다. 작품은 7월 16일까지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상영된다.

사진 출처: 연극열전


 

 

교육을 향한 의심,  ‘레슨 제로’

 

▲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우리가 되는 방법」

지난 5일, 과천의 서울대공원 내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다. 나들이에 나온 가족들로 북적이던 공원과는 대조적으로 미술관 내부는 꽤나 한적했다.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목격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 속의 한 남성이 돌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던 것이다. 자세히 들어보니 돌에게 새의 행동양식을 가르치고 있었다. 스크린 옆에 놓인 작은 TV화면 속에서도 돌을 향한 강의가 한창이다. 국문학 전공자인 영상 속 강사는 돌에게 시인 정지용의 작품들을 설명한다.
길고도 지루한 이 두 강의를 듣다 보면 독단적이고 통제적인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 대한 작가의 비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돌’은 교사의 수업에 반응하지 않는 학생들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 교사가 아무리 떠들어도 돌은 말을 할 수 없다. 교사는 돌아오지 메아리를 울릴 뿐이다. 어쩌면 교사는 돌이 자신의 말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도 습관처럼 입을 움직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2시간가량의 영상을 끝까지 볼 수는 없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얼마 가지 못해 바닥을 가득 채운 설치미술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마네킹이나 빗자루, 양동이 같이 온갖 잡다한 물건이 올려진 철제 저울이 오와 열을 맞춰 줄지어있었다. 「우리가 되는 방법」이라는 작품의 제목에 걸맞게 저울추는 모두 5.06kg으로 통일돼 있다. 서로 다른 형상들이 ‘우리’라는 이름 아래 5.06kg에 맞춰지기 위해 억지로 재단된 모습은 부자연스러움을 만들어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집단의 폭력성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 마냥 아름다워 보이는 ‘우리’라는 단어 속에 숨어있는 강제성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5.06이라는 숫자는 5월 6일을 의미할까? 아니면 5학년 6반을 의미할까? 중간에 비어있는 저울은 낙오자를 의미하는걸까?’ 엉뚱한 상상을 하다보니 작가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필자는 이번 전시에서 타카유키 야마모토의 영상작품 「당신의 미래를 말해드립니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2011년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이 프로젝트는 아이들이 스스로 테마를 정해 부스를 제작하고 어른들을 상대로 점괘를 보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크리켓 점’에서 ‘동물 점’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은 각자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점괘를 선보인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하향식 교육을 받아왔다. 그러나 작품 속 아이들이 어른들의 점괘를 보고 조언하는 모습을 통해 이런 교육 방식에 대한 신선한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을 본다면 교육의 본질을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전시 ‘레슨제로’는 6월 18일까지 계속된다.

글·사진 이태성 기자 taesung1211@hanyang.ac.kr


 

 

 

청춘의, 청춘에 의한, 청춘을 위한 전시 
‘YOUTH – 청춘의 열병, 그 못 다한 이야기’

 

▲ 디뮤지엄에서 진행중인 ‘YOUTH – 청춘의 열병, 그 못 다한 이야기’전(展)

SNS상에서 20대의 ‘인증샷 명소’로 화제가 되기도 한 ‘YOUTH – 청춘의 열병, 그 못 다한 이야기’전(展)이 오는 28일까지 디뮤지엄에서 진행된다. 총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눠진 이번 전시는 자유, 반항 등의 키워드로 대표되는 ‘유스컬처(Youth culture)’를 주제로 청춘에 관해 이야기한다.
첫 번째 공간의 주제는 ‘비틀거리는 청춘과 그 일탈의 기록’이다. 입장하자마자 펼쳐진 어두운 조명은 네온사인과 아날로그 TV 등의 전시 소품들을 부각하는 최적의 설정이었다. 이곳에서는 사진작가 로저 메인이 사진으로 남긴 5·60년대 유스컬처의 탄생과 함께 전시대와 장소에 걸쳐 나타나는 청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저항정신을 대표하는 스케이트, 힙합 관련 소재들을 통해 기존의 것을 배척하는 유스컬처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시 작품 전반에서 그려지는 청춘은 몰려다니다가도 혼자서 고뇌하고, 일탈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불안정한 청춘의 모습이 ‘틀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타투 아티스트 스캇 캠벌은 설치된 스크린 속 영상을 통해 “제 작업방식이 어른스럽지 못하지만, 즉흥적으로 저질러버리는 방식이 항상 좋았어요”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창의성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두 번째 공간의 주제는 ‘아름다운 청춘들의 가슴 떨리는 순간’으로, 청춘의 감성을 보여준다. 첫 번째 공간과는 달리, 밝은 조명 아래 사진 작품 위주였다. 이곳에서 사진작가 파울로 라일리는 청춘의 사랑을, 마샤 데미아노바와 앤드류 리먼은 청춘의 순수함을 표현했다. 눈에 띄는 작품은 라이언 맥긴리의 「졸업앨범」이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400여 장의 사진들과 그 사진 속 나체의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자유와 개성을 표현한다. 두 번째 공간의 작품들을 감상하다보면 진정한 청춘의 감성이 사랑, 순수, 자유로움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청춘에는 편견이라는 것이 없다. 우리는 백지와 같은 상태로 돌아가 다시 순수해져야 한다”라는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의 청춘 예찬을 끝으로 전시는 마무리 됐다.
젊음을 대표하는 단어 ‘청춘’. 무엇이 청춘인지, 청춘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궁금하다면 ‘YOUTH’전(展)을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글·사진 노은지 수습 기자 yoeun619@hanyang.ac.kr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영화 「언노운 걸」

▲ 영화 「언노운 걸」의 포스터

영화 「언노운 걸」은 벨기에 출신의 세계적 명감독 ‘다르덴’ 형제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지난 3일 국내에서 개봉해, 인간의 죄의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제니 다벵’은 동네에서 작은 진료소를 운영하는 의사다. 어느 날 제니의 진료소에 한 소녀가 찾아와 다급히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제니는 진료시간이 종료됐다는 이유로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다음날, 그 소녀는 변사체로 발견된다. 이 사실을 접한 제니는 죄책감에 눈물을 떨구며 소녀의 신원을 밝히고, 가족들을 찾아주겠다고 다짐한다. 제니가 소녀의 죽음에 대해 파헤치려 하자 사건의 관련자들은 소녀의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으며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다. 목격자들은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 봐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며 침묵한다. 소녀의 죽음을 묻으려 하는 그들의 방해에도 제니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 속 방관자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작년 6월 발생한 구의역 사고가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 청년이 밥 먹을 시간이 없어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싸늘한 주검이 돼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을 때도 관련자들은 진실에 대해 침묵하며 책임회피에 급급했다. 잘못에 대한 죄책감과 반성보다도 자신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앞선 순간이었다.
침묵하는 방관자들은 자신의 침묵이 ‘중립’의 덕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침묵은 사실 중립이라 할 수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중립의 덕을 지키는 것이 비겁한 이유는 그것이 종국엔 가해자의 편을 들어주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비겁한 중립을 지키며 수수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사소한 관심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해 따뜻한 인간애를 실천해야 한다.
사회 정의는 거창한 데에 있지 않다. 정의는 사소한 행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확인하려면 「언노운 걸」을 통해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참고로 「언노운 걸」을 상영하는 영화관이 많지 않기 때문에 관람하기 전에는 반드시 상영정보를 확인해야 한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쿠르디스탄’ 이들에게도 봄이 올까?

▲ 부암동에 위치한 '라 카페 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사진전 '쿠르디스탄'

부암동의 조용한 카페, ‘라 카페 갤러리’에서 만난 쿠르드 족의 삶은 평화로운 동시에 잔인했다. 이 모순적 표현이 선뜻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이자 사진작가인 박노해의 열세 번째 평화사진전 ‘쿠르디스탄’을 관람하다보면 자연스레 그 의미를 알게 된다. 
‘쿠르디스탄’은 쿠르드 족의 땅이라는 뜻으로 이란과 아르메니아 부근에 있는 산악 지역을 말한다. 쿠르디스탄의 주인이었던 쿠르드 족은 수천 년간 독자적으로 살아왔으나 터키, 이란 등의 침략에 의해 나라 잃은 민족으로 전락하고 만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자신들의 언어와 터전을 모두 빼앗긴 쿠르드 족의 슬픈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박노해 작가가 직접 수집한 중동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은 전시회의 몰입도를 한층 더해주고 있었다. 전시의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은 쿠르드 족의 일상을 담은 흑백사진이다. 특별한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진에는 일상 속에 스며든 식민 지배의 파괴성이 담겨 있었다. 환하게 불이 켜진 집은 터키인들의 감시 때문에 밤에도 불을 끌 수 없는 쿠르드 족의 고통을, 물에 잠긴 다리는 지배국의 이익을 위해 희생된 쿠르드 족의 터전을 보여줬다. 이처럼 ‘쿠르디스탄’전(展)은 쿠르드 족이 처한 식민 치하의 실상을 가감 없이 고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일상을 통해 관람객들이 고통에 공감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각 사진마다 시인 고유의 감성이 담긴 시구(詩句)들도 함께해 그 의미를 더했다. 전시장 입구에 인쇄돼있는 시구 ‘태양만 떠오르면 살아갈 수 있다’ 앞에 가장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멈췄지만, 기자의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시구는 ‘봄은 누구에게나 봄이어야 한다’ 였다. 우리는 지금도 봄을 느끼고 있지만 나라를 잃은 ‘2등 국민’ 쿠르드 족은 봄을 느낄 여유가 없다. 나라를 되찾기 전까진 하루하루가 겨울일 뿐이다. 앞선 흑백 사진들과 대비되는,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한 두 점의 컬러 사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나타낸다. 태양이 찬란하게 비추는 쿠르디스탄의 모습에서 쿠르드 족의 앞날에 따뜻한 햇살이 함께하길 바라는 작가의 소망이 느껴졌다. 나머지 한 장의 사진에서도 소박하지만 온기가 담긴 밥상을 담아내 언젠가 이들도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산중에 있어 길을 찾기가 다소 어렵지만 보통의 전시회와 달리 늦은 시간(오후 10시)까지 열려있으며, 무료 전시이기 때문에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없어도 누구나 즐길 수 있다. 또한 규모는 작지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전시이니만큼 박노해 작가나 쿠르드 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관람해볼 것을 권한다. 전시는 6월 28일까지 계속된다.

글·사진 손채영 기자 scyeong02@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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