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음식과 소설, 음식과 문화
[교수칼럼] 음식과 소설, 음식과 문화
  • 김미영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
  • 승인 2016.11.21
  • 호수 14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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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영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
우리는 지금, 비만한 시대에 살고 있다. 풍요로운 음식의 미각 때문에 비만하기도 하지만, 미디어의 다양한 음식 프로그램이라는 시각에서도 비만을 겪고 있다. 소위 ‘먹방’ 프로그램이라 불리는 예능프로그램들이 제목도 제대로 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게 방송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들이 음식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사실, ‘음식’은 예능 프로그램의 유희적 성격을 충족시켜 주는 단순한 소재 차원의 대상은 아니다. 음식은 인간의 생존을 책임지는 가장 유물론적인 형태로서 인류의 역사와 동일한 역사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식의 재료와 음식을 만드는 과정, 그리고 음식을 함께 나누는 과정에는 인류의 삶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재현하고 있는 서사장르나 회화(繪畵)에는 ‘음식’이나 ‘식사’ 장면이 중요한 소재로 다루어진 것이다.
회화에서는 일찍부터 음식제재에 대하여 관심을 많이 가졌다. 서양미술사에서 음식물 정물화가 독립적인 장르로 그려진 것은 17세기 무렵인데, 정물화에서 음식물 소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 편이다. 귀족들의 야외 식사 장면, 민중들의 요리 장면, 또는 아르트센의 <푸줏간>처럼 식재료를 보여주는 회화들은 모두 각 시대의 삶과 문화를 담고 있다.
영화에서는 <바베트의 만찬>이나 <카모메 식당>처럼 음식을 만드는 행위 그 자체가 정체성 확립의 은유가 되기도 하고, 낯선 타자들과의 소통에 ‘음식’이 중요한 매개체로 활용되기도 한다. 당연히 소설에서도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다양하게 그려지고 있다. 내가 읽은 음식 소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포콜릿』이다. 이 작품은 22년간 걸친 아름답고도 처연한 사랑 이야기를 멕시코 요리의 향긋한 냄새와 맛을 통해, 그리고 남미적 환상을 도입하여 보여주고 있다. 최근, 맨부커상 수상으로 주목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음식과 식사장면도 갈등을 드러내는 모티프가 될 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이 된다.
오늘은 한국 근대소설의 효시인 이광수의 <무정>에 나타난 음식을 소개하고 싶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 박영채는 정혼을 한 사람이 있고, 기생 신분이면서도 정절을 지켰으나 이를 결국 잃고 만다. 이로 인해 그녀는 자살을 결심하고, 고향인 평양으로 떠난다. 기차에서 유학생 김병욱을 우연히 만나 자신의 판단에 오류가 있음을 확인하고 새 인생을 출발한다. 이때 기차에서 만난 두 여성 사이에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마음의 문을 열도록 도와주는 소재가 바로 음식이다. 당시 구여성에 해당하는 박영채가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낯선 음식은 ‘샌드위치’였다. 샌드위치의 묘사를 보면 이렇게 제시되어 있다. ‘영채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구멍이 숭숭한 떡 두 조각 사이에 엷은 날고기를 낀 것이다. 영채는 무엇이냐고 묻기도 어려워서 가만히 앉았다.(중략) 별로 맛은 없으나 그 새에 낀 짭짤한 고기 맛이 관계치 않고 전체가 특별한 맛은 없으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운치 있는 맛이 있다.’ 인용문에는 샌드위치를 처음 먹어본 영채의 느낌이 잘 드러나 있다. 이처럼 <무정>에 나타난 새로운 음식은 낯 선 사람 사이의 대화를 잇게 해 주며, 최종적으로는 생명을 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에게 음식은 단지 생리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생존 수단만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사귐과 소통의 중요한 수단이다. 음식을 나누면서 하는 대화는 어색한 분위기를 공감의 분위기로 만들며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서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요즘처럼 혼밥, 혼술 등이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잡아가는 때에 잠시 음식의 문화적 의미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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