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신조어에 대한 소회
[교수칼럼] 신조어에 대한 소회
  • 이형중<의대 신경외과학교실> 교수
  • 승인 2016.10.29
  • 호수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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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종<의대 신경외과학교실> 교수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신조어의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사유가 아닌 검색이 현대를 규정짓는 중요한 특징이기는 하지만 도처에서 보이는 희한한 단어들은 TV 방송, SNS, 스마트 폰에 힘입어 불티나게 유통되고 있다. 더 이상 아재나 꼰대로 남지 않으려면 빨리 그 뜻을 찾아서 적절하게 사용해야만 한다.
그런데 신조어 중에서도 취업과 관련된 것들 - 오스트랄로스펙쿠스, 호모인턴스, 부장인턴, 금턴, 흙턴, 동아리고시, 화석선배, 자소서포비아, 서류가즘, 혼밥, 밥터디, 이태백, 삼일절, 대2병, 사망년, 십장생 - 의 뜻을 알게 되면 속이 개운치만은 않게 된다. 십여 년 전의 88만 원 세대를 필두로 구포세대, 헬조선에 이르기까지 젊은이들의 비관적인 현세판단과 씁쓸한 자괴감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하여 착잡할 따름이다.
전윤호 시인의 ‘서른아홉’은 “사십이 되면 더 이상 투덜대지 않겠다. 이제 세상 엉망인 이유에 내 책임도 있으니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무조건 미안하다..”로 시작한다. 그렇다. 내가 착잡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지금의 후배, 제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형편이 좋았던 과거에 공부하고 졸업하여 현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지금에서 마냥 누구를 비판만 하기에는 누워서 침뱉는 꼴이 되어 버린 셈이다. 더구나 옛날 무용담을 소환하면서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재단하는 것은 정말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쑥스러운 일이다.
수시성적이 좋다는 학생들이 들어오는 의대, 병원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나름 날리던 학생이 치열한 상대평가 속에서 하위권으로 쳐지며 자존감을 잃고, 경영난을 이유로 특정과의 전공의 정원이 줄어들어 성적이 좋은 학생도 그 과를 전공하고 싶으면 다른 과나 병원으로 옮겨야 하며, 전문의를 따고 교수직을 원해도 전임의, 임상교원이란 이름의 임시직을 하릴없이 계속해야만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다른 전공과나 대학의 사정도 더 나아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와중에서도 의대교수는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의 구현이 의학의 다른 한 얼굴이길 바라면서 교육과 진료를 위해 전공의와 학생, 간호사를 닦달해야만 한다. 이런 저런 사정을 다 봐주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되는 게 없을 거라는 노파심에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애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은 쓰기는 쉽지만 아무나 행하기는 정말로 불가능한 단어이다.
작년에 대학생이 된 아들과의 대화에서 느끼는 사고방식의 괴리감과 피드백의 정도 차이는 윗사람에게 그냥 순종만 하면 어느 정도 앞날이 보장되던 옛날의 내 처지와는 많이 달라졌음을 새삼 상기시킨다. 지난 대선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간극을 극명하게 드러낸 ‘세대차이’라는 새로운 계급구조를 만들어 낸 바 있다. 신, 구세대는 우주에서 온, 서로 이해하지 못할 언어를 가진 외계인이 되어 버렸다. 생각은 언어를 만들고, 언어는 행동과 신념을 만들어 낸다.
부당함이 있으면 문제제기를 하고 기꺼이 수면에 드러내 놓기를 아들과 후배, 제자들에게 말한다. 자기들만의 은어로 침잠하지 말고 아재들에게 이를 가르쳐줘서 문제의식을 나누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기성세대들이 아련한 과거에만 젖어들어 자식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최소한 줄어들기를 바란다. 이제는 얌전히 말만 잘 들으면 누가 입에다 떡을 먹여주는 일방적이던 활황의 경제시대는 지났다. 아쉽지만 파이는 정해져 있다. 어차피 누군가는 덜어주어야 이를 담을 사람도 생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덜어줄 사람이 내 뒤를 이을 후배, 제자들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래서 혼밥대신 혼(混)밥을 먹기 바라고, 오스트랄로스펙쿠스 대신 오스트랄로스펙타클같은 미래지향적인 희망찬 신조어가 생기길 바란다.

이형중<의대 신경외과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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