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우리는 아직도 일본 관련 쟁점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 일본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 과거 어두운 기억들을 재생시키며 벌어지는 한일 간의 마찰은, 우리가 치유하고 넘어서야 할 제국-식민의 문제가 엄존하고 있음을 잘 알려준다. 그 가운데 일제 말기에 전쟁에 동원되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때의 비극을 ‘몸의 기억’으로 지닌 채 가장 고통스런 지점에 남아 있다.
어쨌든 우리는 명백한 실증으로 드러난 역사적 사실조차 망각과 은폐를 서두르는 담론들 앞에서, ‘몸의 기억’이 내지르는 고통스런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은, 그 목소리가 과거 사실에 대한 증언과 고발의 성격을 띠고는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기억’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몸의 기억’은 과거에 집착하는 퇴행이 아니라, 새로운 의제 설정의 구체적 영토에서 행해지는 신생의 작업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기억’이란 ‘기록’보다 더 선명하고 또 오래도록 출렁이는 법이다.
우리를 결손 민족으로 비하하면서 하루 빨리 일본에 동화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했던 이들은, 내선일체와 황국 신민화의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전쟁 참여를 독려하였다. 얼추 잡아 20만 명을 헤아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러한 폭력의 한가운데 있는 ‘몸의 기억’이다. 이때 우리는 ?귀향?과 함께 잔잔한 파문을 던져주고 있는 영화 ?동주?(감독 이준익)를 통해 제기된 제국주의 희생자들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연쇄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최근 위안부 협상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나,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복간본을 들고 그때의 기억을 소중히 안아들이는 이들의 마음에는, ‘몸의 기억’으로서의 역사가 은은하게 배어들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몸의 기억’이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폭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존재값을 지키려는 상징적 장치다. 우리는 모든 타자를 해소시키면서 동일성을 확보하려 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전도된 오리엔털리즘’에 천연스럽게 협력했던 이들의 모습을 반성하면서, 이러한 ‘몸의 기억’을 통해 그들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역사는 폭력에 무참하게 희생되어간 이들에 대한 예의를 비로소 갖추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몸의 기억’에 대해 우리 학생들이 관심을 가져주기를 마음 깊이 소망해본다.
저작권자 © 한대신문 :: 빛나는 예지, 힘찬 붓줄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