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비극적이지 않았다
그는 비극적이지 않았다
  • 윤가은 기자
  • 승인 2016.02.29
  • 호수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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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키워드로 말하는 반 고흐의 삶


네 가지 키워드로 말하는 반 고흐의 삶
시대를 초월한 천재성과 대중적 인기, 그리고 엄청난 금액의 경매가를 자랑하는 예술가가 있다. 그러나 그 예술가는 한창 작업에 몰두하던 무렵 인체 비율을 엉망으로 그린다는 비판과 그림에 매력이 없다는 핀잔을 받기도 했다. 그런 그는 수채화를 사용해보라는 미술계 지인들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색을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는 유화를 선택했다. “예술은 기질을 통해 바라본 자연의 한 측면이다.” 예술가의 개성을 절대시한 에밀 졸라의 말에 그는 자신의 예술을 지킬 힘을 얻었다.

 

“책”
반 고흐는 상당한 교양인이었다. 그의 그림과 예술관은 풍부한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됐다. 그는 미술 이론과 평론에 관한 책뿐 아니라 문학에 심취해 있었다. 셰익스피어, 디킨스, 위고, 졸라…. 특히 그는 서민의 고단한 삶과 예술가의 고뇌를 그린 책에 깊이 공감했고 이는 그의 그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책을 읽기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그림에도 종종 등장시켰다.
<성서와 프랑스 소설이 있는 정물> 1885
이 그림에는 한가운데 성서가 펼쳐져 있고, 그 옆에 꺼진 촛불과 프랑스 소설이 놓여 있다. 반 고흐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무렵 그려진 이 작품에서, 죽음과 덧없음을 의미하는 꺼진 촛불은 아버지의 죽음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옆에 비스듬히 놓인 프랑스 소설은 반 고흐가 좋아하는 소설가인 에밀 졸라의 「생의 기쁨」으로, 신을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목사였던 그의 아버지가 싫어했던 책이다. 성서와 걱정하지 않고 생의 기쁨을 누리며 살자는 제목의 이 프랑스 소설은 대립한다. 촛불이 꺼졌음에도 함께 놓여있는 두 책은 부자의 영원한 갈등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반 고흐는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을 그림에 배치함으로써 주제를 암시하기도 했다.

 

 

 

 

“일본”
1850년대부터 유럽은 일본과 물적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문화도 함께 수입됐고 풍속화인 우키요에가 인기를 끌었다. 마네와 밀레 같은 대가들도 그 매력에 빠졌고 반 고흐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키요에의 특징인 명확한 윤곽선과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는 평면, 그리고 배경이 모호하다는 점은 그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반 고흐는 우키요에의 그런 특징을 자신의 그림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본연의 개성은 잃지 않았다. 유화를 두껍게 칠하는 임파스토 기법으로 질감을 생생히 전달하곤 했던 그는, 일본 판화의 표면에 진 주름을 임파스토 기법을 응용하여 표현해냈다.
<이탈리아 여인> 1887~88
이 그림은 반 고흐가 술을 마시러 자주 찾은 카페의 주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초상화이다. 한때 그와 연인 사이였다고 알려진 이 여인을 담은 작품에서는 우키요에 양식이 많이 사용됐다. 원근법이 사라지고 평면화된 의자와 인물, 또렷이 그어진 윤곽선, 노랗게 단색으로 칠해진 배경, 그 위의 비대칭 테두리가 바로 그것이다.

 

 

 

 

 

“초상화”
생계를 위해 풍경화를 그릴 때도 반 고흐는 늘 초상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특히 그는 빈곤한 삶을 살았던 이들에게 관심이 많았고, 그림을 통해 이들의 삶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이때 개별 인물의 특성 보다는 그 인물이 속한 집단의 성격에 맞게끔 외형을 의도적으로 변형시켰다. 그래서 그의 초상화 속 모델은 사실적이지 않고, 과장되고 단순화됐으며 거칠게 표현됐다.
<모자를 쓴 여인> 1885
그림 속 여인은 반 고흐가 농부들의 조촐한 식사 풍경을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에도 등장한다. 여인은 “거칠고, 입술이 두껍고, 얼굴은 새까맣게” 칠해졌으며, 반 고흐가 자주 그리던 전형적인 농부로 묘사됐다.
반 고흐는 초상화에 애정이 많았던 만큼 당시 시들해져 가는 초상화의 인기를 바로 세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초상화가 인물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 머물 것이 아니라, 인물을 유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개별 시대와 장소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배경은 모호하게 처리했다. 반 고흐는 밭이나 농업 기구를 그리지 않고 인물의 과장된 외형을 그림으로써 인물이 농부임을 드러냈다.  붓질 또한 고르지 못하게 처리해 농촌의 거친 이미지를 형성하려 했다.

 

 

“밀밭”
창밖 밀밭을 바라보며 반 고흐는 죽음을 생각했다. 밀이 익으면 베어지듯 사람도 때가 되면 죽는다는 점에서 밀과 사람이 닮았다고 여겼다.
<추수하는 사람> 1889
햇살이 넘치는 들판에서 농부가 곡식을 거두고 있는 이 그림은 따뜻한 색조와는 대조적으로 농부가 다 익은 수확물을 베는 저승사자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런 죽음은 “해가 순수한 금빛으로 모든 걸 비춰주기에” 반 고흐는 전혀 슬프지 않았다. 죽음을 우울하고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의 태도가 나타난다.
이런 점에 비춰 볼 때, 그가 마지막에 그린 그림이라고 잘못 알려진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그리 비극적이지 않다. 하늘 아래 샛노란 곡식이 풍성하게 익어있다. 곡식을 가로채 농부의 결실을 방해한다고 전해지는 우화 속 까마귀는 쫓겨 날아간다. 방해꾼은 사라졌고 결실은 안전하기 때문에 수확을 기다리는 곡식 또한 죽음이 두렵지 않다.

표면의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슬픔으로 사람을 비춰 본 반 고흐. 차차 높아지는 명성에 오히려 반감을 드러냈던 반 고흐. 갈 곳 없는 가난한 여인과 그의 아이들을 지나칠 수 없어 그들과 함께 살았던, 소박한 것에서 성스러움을 찾아낸 그의 삶은 비극이라는 이름 아래에만 두기엔 너무 폭력적이다.

 

참고 자료: 도서「고흐」 (주디 선드 지음, 남경태 옮김)
이미지 출처: NAVER, VAN GOGH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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