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가난한 보수가 되면 안 되는 이유
[장산곶매] 가난한 보수가 되면 안 되는 이유
  • 전예목 기자
  • 승인 2015.11.28
  • 호수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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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논란이 되기도 한 책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는 ‘가난’이 사람들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잘 묘사돼 있다. 특히 크리스마스 저녁식사 장면이 백미다. ‘포도주에 적신 빵’ 하나가 크리스마스 만찬이고 주인공 제제의 형 또또까가 ‘저런 것마저 못 먹는 사람도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가난이 그들의 삶 속에 촘촘하게 파고 들어가 있음을 알려준다.
문득 우리나라의 ‘가난하면서 보수적인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묘사되고 있는 브라질에서와는 달리 우리나라에는 가난하면서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꽤나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겉모습만으로는 가난을 알아채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정도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유지되고 있기에 겉모습으로는 ‘가난’ 유무를 알기 힘들다. 다시 말해 옷이 헤져 있거나 유리걸식하지 않는 이상 누가 얼마만큼의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기 힘들다. 또 집값에 따라 비슷한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살다 보니 상대적 빈곤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에 둔감해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2014년에 서울시에서 조사한 통계에서 ‘귀하는 어느 정도 보수적 또는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보수’라고 답한 비율은 소득 100만 원 미만과 100~200만 원 미만에서 각각 58.7%와 44.5%인 반면, 500만 원 이상은 29.6%만 ‘보수’라고 답해 대조를 이뤘다. 일반적으로 소득이 낮으면 사회에 불만을 가져 진보 성향이 강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가난하면서 보수’인 사람이 많아질수록 기득권층의 아성이 공고해 진다. 이들은 자신이 가난한 줄 모르기에 가난 구제를 위한 정책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법자가 빈곤한 노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나 조치를 애써 취할 필요가 없다.
이런 현대 사회의 단상은 전근대의 기득권층이 몰락한 점을 반면교사로 삼은 현 기득권층의 교묘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예전의 왕조 국가에서는 신분과 계급에 따른 의복과 주거와 관련된 규칙이 엄격하였다. 집을 지을 때의 자재나 방의 개수, 착용 가능한 옷의 종류까지 치밀하게 정한 것이 그 예다. 이는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서 궁극적으로 아랫사람을 효과적으로 거느리기 위함이었으나 나중에는 도리어 독이 돼 사회 갈등과 위화감만을 조장하기 이르렀다. 결국 누적된 갈등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체제를 불안정하게 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더 교묘한 수법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예를 들어 보통 선거를 시행하거나 ‘국민에게 권리가 있다’는 말로 포장해서 사람들의 동요를 일차적으로 안정시킨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로 ‘평등’한 상태에 있다고 착각하게 되고 가난하지만 보수인 사람이 다량으로 발생 한다.
물론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기득권의 권리를 일정 부분 대중에게 양도하는 것이기에 실질적인 권리가 감소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투자 대비 이익이 훨씬 탁월하므로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다. 이것이 더 세련된 통치 방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가 절대선이라는 허상에 가려져 보수를 외치는 이들은 사회 고위층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입지를 고착하고 있는지 정확히 꿰뚫어 보는 눈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후에 자신도 모르게 시나브로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늪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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