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유희가 아닌 성찰을 위해 존재하는 '인문학'
지적 유희가 아닌 성찰을 위해 존재하는 '인문학'
  • 전예목 기자
  • 승인 2015.10.02
  • 호수 14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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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가장 한국다운 책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바로 그 책이다. 책의 내용을 보면 ‘넓고 얕다’기보다는 ‘좁고 얕다’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하다. 다양한 분야를 다루다보면 내용의 깊이는 얕을 수밖에 없다. 상황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정보를 주거나 독자에게 경도된 생각을 유도해서는 안 된다. 이는 레스토랑에서 잘나가는 음식의 ‘샘플러’(sampler)을 주문했을 때 다른 레스토랑의 음식을 가져오거나 음식 맛을 알기 어렵게 조리해 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책에서는 잘못 나온 ‘샘플러’들이 몇 부분에서 보인다. 내가 잘 모르는 영역은 차치하더라도 학교에서 조금 배운 역사 영역에 대해서만 논해보자면 이 책은 시각이 다소 편협했다.
먼저 시간관과 관련해 설명한 곳에서 오류가 발견된다. 처음 역사와 관련된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저자는 ‘시간관’(時間觀)을 말한다. 이때 서양과 동양의 시간관을 각각 직선적 세계관과 원형적 시간관으로 정의했는데 여기에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어떤 경우에든지 단순화해 정의할 때는 세부적인 것을 포함하지 못하는 불가피한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그 오류의 피해가 크다.
서양의 시간관에 대해 말한 것을 살펴보자면 책에 ‘서양의 그리스도교는 직선적 시간관을 토대로 한다. 그리스도의 세계에서 인간은 탄생하고 성장해 죽음에 이른 후 영원한 세계로 나아간다’고 언급하는 곳이 있다. 우선 그리스도교로 비롯된 시간관은 직선적 시간관이 아니라 종말론적 시간관이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심판론’은 세상의 종말을 상정하기에 시간의 끝이 존재한다. 따라서 무한히 진행하는 ‘직선’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직선론적 시간관은 무한한 인간의 진보를 믿었던 빅토리아 시대 일부 영국 사학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서양의 시간관이 꼭 한 가지 시간관으로 유지되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심지어 그리스·로마 시절의 서양 사람들이 직선적 세계관과 반대로 역사의 진보가 아닌 후퇴성을 더 강조한 시대도 있다. 헤시오도스(Hesiodos, ?~?; B.C 8세기 말 경으로 추정)가 「노동과 나날(Erga kai Hēmerai)」이라는 책에서 인류 역사를 다섯 시대로 구분한 적이 있다. 이때 헤시오도스는 인류 역사를 황금시대, 은의 시대, 청동의 시대, 영웅의 시대, 철의 시대로 나누고 세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보다 세상이 나빠졌다고 본다.
이후 저자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사관에 따라 인류의 역사 전체를 분석한다. 마르크스 사관은 서양의 역사적 사건을 비교적 잘 설명해 줄지는 모르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는 부족하다. 오히려 이런 사관을 믿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를 이해할 때 방해가 될 수 있다. 서구 중심적 사상에 맞지 않는 우리 역사를 보면서 문화적 열패감에 빠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보다 더 객관적인 역사 개설서가 되려면 차라리 역사적 사건을 요약해서 기술하는 편이 더 바람직한 선택일 것이다.
사실 책 내용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책이 한국 사회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지식을 정확히 알고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에게 얼마나 더 아는 척을 잘 하고 지식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진정한 진리와 지식을 탐구하려는 태도가 아닌 남에게 아는 척하고 잘나 보이기 위해 지식을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태도와 문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문학적 지식은 단순히 지적 유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비판적 담론의 생성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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