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 두고
공자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 두고
  • 전예목 기자
  • 승인 2015.09.12
  • 호수 14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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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에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관련된 뜻깊은 곳을 방문했다. 그곳은 바로 안동에 자리잡은 임청각(臨淸閣)이다. 임청각은 예로부터 안동의 명승지로 이름나 있었는데   택리지에 따르면 ‘동쪽에 있는 임청각은 이씨가 대를 이어 사는 집인데, 이것들이 영호루와 함께 고을 안의 명승지이다’고 돼있다. 이 고택은 낙동강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앙선이 건물과 아주 바짝 붙어 있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왕십리의 중앙선이 먼 안동까지 오는 게 신기했다.
이 고택은 고성 이씨가 조선시대 때부터 대대로 이어온 건물로써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의 생가로 유명하다. 이 선생은 한일합병 이후 간도 지방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고성 이씨의 종손인 이 선생은 자신의 고향에서 부유하게 살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를 버리고 간도로 1911년에 이주했다.
선생은 유교의 본고장인 안동에서 어렸을 때부터 유교를 깊이 배웠지만 후에 서양 학문을 접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런 융통성 있는 학문관은 선생이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갈 때 “공자·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 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 읽어도 늦지 않다”라고 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실제로 선생은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종들을 모두 풀어줬다. 후에 고향을 떠나 독립운동을 하는 것만으로 모자라 독립자금이 필요하자 임청각과 자신 소유 토지를 팔아버렸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을 투철히 실천한 사례다.
그렇지만 독립운동의 대가는 혹독했다. 이상룡 선생은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 찍혀 안동에 중앙선이 들어올 때 일제는 임청각의 중앙을 갈라버렸다. 이제야 왜 그렇게 철도가 고택에 바짝 붙어 전반적으로 갑갑한 느낌을 주는지 알게 됐다. 임청각은 철도 부설 때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을 철거당해 지금의 모습은 본래 모습과 많이 달랐던 것이다.
임청각을 다른 시점에서 바라보고자 임청각 뒷편의 길을 올라가 보았는데 거기에는 허물어가는 한옥이 하나 있었다.  한옥의 정체가 궁금해 마침 주변에서 음식을 드시던 주민 분께 건물의 사연을 여쭤보았다. 들어보니 그 한옥은 원래 고성 이씨의 서당으로 쓰이고 있었는데 가문에 돈이 없어서 한옥 관리를 못하고 방치해 두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셨다. 아무래도 이상룡 선생을 필두로 하여 여러 세대가 독립운동에 전념하다 보니 집안에 곳간이 비어 예전과 달리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문화재청에서는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던 임청각을 복원할 예정이다. 이미 임청각의 군자정과 연지는 어느 정도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고 2020년 우회 철도가 개설된 다음 임청각 앞에 바짝 붙어 있는 철도를 없앨 계획이다. 그런 다음 임청각을 명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다행히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라 우리가 잊고 있었던 독립, 애국지사에 대한 되새김과 발굴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일신의 안위와 영달보다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애국지사 분을 온전히 쫓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분들의 뜻을 따르려 노력하는 것은 가능하다. 자기 주변에만 시야를 두기보다는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과 불합리한 사회의 부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자세가 이 시대를 사는 지성인에게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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