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로]‘이해의 선물’
[진사로]‘이해의 선물’
  • 정주현<대외협력처 대외협력팀>계장
  • 승인 2015.05.30
  • 호수 14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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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침의 지하철은 직장인에겐 전쟁터다. 서로에게 기대 꼼짝달싹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목적지까지 가는, 한시적 운명 공동체가 매일 아침 생겼다 사라진다.
안타깝게도 한창 청춘을 지나고 있는 고등학생의 묘한 체취를 덮어쓰게 되거나, 옆에 선 중년 남자가 전날 마신 술의 종류를 본의 아니게 알게 되는 불상사도 이따금 생긴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부랴부랴 집을 나선, 여느 때와 같은 출근길이었다. 지하철이 들어오고 한 바탕 밀고 당기는 전쟁을 치를 생각에 이미 신경은 날이 서 있는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내가 탄 칸 한쪽이 텅 비어 있는 것이었다.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 기분 좋게 책까지 펴고 앉았는데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가 풍겨왔고, 중년 남성의 덜 깬 술 냄새와는 격이 다른, 과연 지구상에 존재할까 싶은 고약한 냄새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잔뜩 찌뿌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는데, 바로 대각선 맞은 편 자리에 한 여름임에도 다 헤진 외투를 덕지덕지 걸친 이른바 ‘부랑자’로 보이는 남성이 신발까지 벗은 채 당당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 눈에 보아도 두세 달은 씻지 않은 행색이었다. 사람들이 자리를 피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 그 옆에 앉은 한 사람이 눈에 들어 왔다. 나이는 40대 중반 가량 되었을까. 말끔한 차림에 분위기를 보아 분명 일행은 아니었다. 굉장한 악취에도 피하지 않고 옆 자리에 앉아 조용히 성경책을 읽고 있었고, 그 위로 미끄러져 가는 그의 시선은 평온하고 침착했다.
나는, 그가 왜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마음속에 조용한 감동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둘 중 누가 먼저 앉았든 그도 분명 악취를 느꼈을 것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곧장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그가 자리를 뜨지 않은 것은, 아마도 한동안은(어쩌면 오랫동안) 이렇게 떠돌며 생을 살아낼 사연 모를 옆 자리의 남자에게 주는 일종의 격려이자 이해라고, 나는 느꼈다.
비록 직접적인 도움은 못 줄지언정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에게 눈 돌리고 외면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는 말없이 전하고 있다고도.
비록 내겐 종교가 없지만, 그리고 그가 정확히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섬기는 신이라면 분명 훌륭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잠시지만 그가 보여준 고매한 인품이 종교보다 앞선 이유일지도 모를 일이다.
일곱 정거장을 서울 아침 지하철 답지 않은, 생경하게 텅 빈 공간에 셋만 남아 더 달리다 내가 먼저 내렸다. 그리고 나는 떠난 지하철이 남긴 진동이 멎고서도 한참을 더 플랫폼에 서 있었다. 남아 있던 두 사람에게 나 역시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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