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사설]이념의 우상
[교수사설]이념의 우상
  • 한대신문
  • 승인 2015.05.17
  • 호수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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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철학자 베이컨은 인간의 참된 지식 획득을 방해하는 요인들을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라는 네 가지로 요약해 제시하였다. 온갖 사물을 오직 인간의 입장에서만 이해하고, 개개인의 작고 좁은 세계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하며, 상호작용 과정에서 언어와 실재 사이의 혼동을 키우고, 전통이나 권위의 힘에 의존해 비판적 사고 과정을 포기한다는 것이 네 가지 우상이 의미하는 바이다. 우상에 압도된 당대의 사람들이 선입견과 편견에 휩싸여 참된 앎을 실현할 수 없었다는 것이 베이컨의 설명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새롭고 강력한 우상을 목격하고 있다. 다름 아닌 이념의 우상이다. 이념의 우상이란 진실과 진리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이념에 의해 먼저 평가되거나, 이념으로 덧씌워져 일방적으로 판단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실체적 내용에 앞서 어떤 이념을 가진 누가 그 말과 행동을 했는가에 따라 평가된다. 사회적인 쟁점에 대한 목소리는 그것의 반향과 울림을 따지기에 앞서 특정한 색깔을 지닌 이념의 목소리로 판단된다. 이념의 우상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가능성은 차단되며 참된  진리에 이르는 길도 가로막히게 된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손쉬운 방법의 하나로, 이념에 대한 외면을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본래 이념이라는 것이 인간의 사상, 행동, 생활양식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나 신조의 체계라는 점에 비춰볼 때 이념에 대한 외면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이념 그 자체가 아니라 이념의 우상이 힘을 발휘하는 현실이다. 만약 요즘의 대학생들에게 그 해법을 묻는다면 아마도 중립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할 것이다. 이념의 두 끝은 모두 잘못된 것이니 정확히 중간의 위치에 서서 불편부당한 시각을 갖도록 노력하자는 주장이 일반적인 모범 답안으로 제시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항상 중간에 서겠다는 기계적인 중립은 이념의 우상을 극복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이념의 우상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마음가짐에서 기인한다. 
중간의 위치란 이념의 우상에 매몰된 사람들이 그 양 끝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기계적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중립을 실현하려면 이념에 의해 평가되는 현실의 옳고 그름을 먼저 따져 보아야 한다. 고민의 결과로, 남들이 말하는 중간과 멀리 떨어진 위치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현실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만의 중간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기계적 중립만을 고수하려 한다면,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닌 기계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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