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새 종족이 지구를 침범했다. 그 종족의 이름은 바로 백패커(backpackers). 21세기판 유목민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 배낭족이다. 그들은 큰 배낭을 메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지구의 이곳저곳을 탐험한다. 백패커 종족의 수명은 개인차에 따라 며칠부터 몇 년까지 그 기간이 다양하다. 이들은 홀로 다니기도, 짝을 지어 친구들 혹은 연인끼리 다니기도 하며 대가족을 이루어 다니기도 한다. 피부색도 다양하며 언어도 수 백가지를 사용한다. 따라서 백패커 종족을 형언할 하나의 단어는 없으며, 이의 구성원은 세상에 일찍 눈을 뜬 어린아이부터 이제야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70대의 노인까지 천차만별이다. 이번 겨울 나는 백패커의 주구성원인 20대 청년이었다. 나의 지구 정복 장소는 유럽 발칸 반도 남반에 위치한 그리스와 유럽과 아시아를 사이에 낀 이색적인 나라 터키였다. 배낭여행을 하고는 싶지만 엄두가 안 나는 독자들에게 세상 물정 모르는 나도 다녀왔음을 알려주고자 <기자가 발로 뛰고 발로 쓰는, ‘배낭여행’ 기록>을 기획하게 됐다. 백패커가 되기 위한 조건은 단 두 가지다. 돈과 시간. 대다수의 지구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하다. 나의 수명은 3주였다. 여기에 열정과 호기심만 있으면 완벽한 백패커 한 명이 탄생한다. 지식? 준비성? 빠른 적응력? 의사소통 능력? 모두 다 부질 없다! 신문사에서 일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여행 자금을 마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여름방학에 ‘돈의 노예’가 되어 앞만 보고 돈만 벌었다. 부모님이 주시는 돈을 마다하지 말자. 자신이 번 돈으로 여행을 떠나야한다는 마음은 버리길 추천한다. 출국하는 비행기 안에서까진 본인 자신이 자랑스럽지만 새로운 곳에 발을 딛고 돈을 ‘쓰기만’ 하는 순간, 그런 자부심과 대견함은 저 멀리 날아갈 테니까. 나는 여름방학동안 고깃집에선 접시를 닦고, 가냘픈 팔목으로 뚝배기 그릇을 옮겼으며, 노량진 고시촌에선 문신으로 온 몸이 가득한 나이 많은 청년을 가르쳤다. 그 외에도 두 개의 과외를 더 했으며, 학원에선 초등학생들에게 강의했다. 이렇게 해서 모인 돈 300만원. 알바 다섯 개를 매일 한 결과였다.
백패커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싼 비행기표만 찾는다. 나는 인천에서 모스크바를 경유해 아테네에 도착하는 표를 샀다. 싼 티켓을 구하다보니 모스크바 공항에서 14시간을 경유해야 했고, 노숙을 했다. 배낭의 모든 고리에는 자물쇠를 채워 발 밑에 두고 엄마의 심부름으로 구매한 면세점 상품 한 꾸러미는 머리에 배고 잠을 청했다. 독자들이여. 절대 면세점 심부름을 받지 않길 바란다. 아니 간청한다. 여행 내내 짐일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나의’ 여행을 망치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아테네 중심지인 ‘신타그마 광장’으로 가는 메트로를 탔다. 경치를 구경하는 내게 여행을 같이하는 수민이가 “야”라고 속삭였다. 고개를 돌리자 “너 가방...”이라며 눈치를 줬다. 내 가방을 쳐다봤고, 배 앞으로 맸던 가방은 열려있었다. 내 앞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홱 고개를 돌렸다. 빨간 손톱을 한 그녀가 머리를 쓸어내리며 태연하게 창문을 쳐다봤다. 당황한 나는 소리를 질러야 할지, 여자의 머리카락을 낚아채 싸워야할지 0.1초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문이 열렸고 여자는 유유히 빠져나갔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가슴을 후벼 팠다.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만 보면 가방을 움켜잡았고 무서웠다. 10분 거리라고 했던 숙소는 길을 헤매 4시간이 걸려 도착했고, 그 날 모든 일정을 취소해야했다. 나의 로망이었던 배낭여행의 첫날이 화려하지만 냄새나게 그 막을 내렸다.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날씨 때문에 행선지를 바꿀 때도 있다. 터키에선 카파도키아에서의 벌룬투어(열기구) 탑승을 위해 계획했던 세 개의 지역을 취소하고 달려가야만 했다. 아테네에선 날씨가 좋지 않아 항구에서 배가 뜨지 않았고, 산토리니에서 이스탄불로 넘어가야 했던 우리는 30만 원 이상을 손해 보며 울며 겨자 먹기로 비행기를 타야했다. 불가항력인 날씨에 당할 때 속상하지만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