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스톡홀름 증후군’ 탈출기
[장산곶매] ‘스톡홀름 증후군’ 탈출기
  • 전예목 기자
  • 승인 2014.12.31
  • 호수 14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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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요즘 세상에 기수제가 있어요? 세상에!” 과 후배에게 한대신문사에 들어오라고 독려하던 중 나왔던 말이다. 이 말은 내가 처음 신문사에 들어올 때 가졌던 생각을 되살아나게 했다. 사실 신문사에 들어와 수습기자로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기수제’였다. 그런데 문득 언제부터인가 변해버린 내 모습을 보고 나 자신이 싫고 부끄러웠다. 한대신문에 들어올 때는 그렇게 기수제를 미워했으면서 어느새 나는 그 기수제에 적응해버린 것이다. 이때 내 머리 속을 스쳐지나 간 것이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었다. 이 증후군은 인질범에게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그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인질인 상태의 사람은 인질범에게 자신의 생사가 달렸으므로 자신을 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호감을 느낀다. 또 인질범에게 잘 보여야 자신이 생존할 수 있으므로 원하지 않는 호의를 범죄자에 게 베풀다가 그 호의가 자신이 범죄자를 좋아해서 베푸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권위주의적 문화라는 인질범의 인질이 되어 그것이 주는 비정상적인 안정감에 도취 됐다. 즉 나는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져버린 것이다. 수습기자 시절 기수제를 강요하는 선배의 말의 요지는 ‘기수제가 있어야지만 신문사가 잘 굴러간다’는 것이다. 기수제를 철저히 지켜야 후배들이 말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잘 따른다고 했다. 물론 선배의 말이 전적으로 틀린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내가 보기에도 기수제는 신문사의 기강을 확립해주고 신문제작의 효율성을 어느 정도 담보해주는 긍정적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또 기자들과 동문 간 의 결속력을 강화시켜준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한대신문은 웬만한 동아리나 과의 동문회에 비견될 만한 선·후배 간의 끈끈한 정을 과시한다. 이 점도 신문사를 하면서 내가 놀랐던 점 중 하나다. 그렇지만 최근의 한대신문 기수제는 그런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권위주의적 문화를 형성하는 기제로 작용했다. 이것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문사의 제1 목적인 ‘좋은 신문 만들기’를 저해한다는 것이다. 신문사 내 권위주의 문화는 직위나 기수로 인해 후배들의 참신한 의견이나 개선사항을 자유롭게 개진되는 것을 막았다. 또 종종 선배의 의견이 독단적으로 작용하는 폐해를 낳기도 했다. 아무리 선배가 신문사에 오래 있어 신문 만들기에 이골이 났다 하더라도 그들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선배도 인간인 이상 판단 착오나 그릇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기수제가 권위주의적 문화로 변질되는 것의 또 다른 문제로는 이것이 특권의식의 뿌리라는 점이다. 선배로서 후배를 보살피고 배려하기보다는 후배로부터 대접받고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후배를 이용 하려 한다. 후배에게 ‘이것 해라’, ‘저것 해 라’ 시키기보다 ‘이것이 필요하지는 않니?’, ‘저것이 부족하지는 않니?’하고 먼저 물어 보아야 하고, 매사 실력과 솔선수범을 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길을 앞서 걸어 간 사람이 할 일이고 성숙한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최근 물의를 빚은 ‘땅콩회항’ 사건도 이런 도덕성과 평등의식의 부재 혹은 무감각에 기인한 것이다. 슬픈 사실은 한대신문사에만 권위주의라는 유령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군대 문화 때문 인지 몰라도 권위주의라는 유령은 한국사 회를 배회하고 있다. 지성의 전당이라 불 리는 대학 강의실 안에서도 교수와 학생은 지식을 매개로 상호 소통하는 관계라기보다 억압과 순응, 혹은 냉소가 작동하는 공간일 때가 많다. 또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는 하지만 여전히 구태의연하고 권위주의 적인 교직원들도 있다. 그러나 날이 밝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 했던가? 우리는 어둠 속에서 희망을 가지려 한다. 나는 이 작은 곳에서 그런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에 임기 동안 이 공간의 무거운 공기를 바꿔보려 노력할 것이다. 우리의 작지만 용기 있는 실천이 이 사회의 뿌리 깊은 적폐를 일소하는 티끌만한 연료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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