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하다]누구의, 어떤 욕심으로 대자보는 붙었나?
[말, 하다]누구의, 어떤 욕심으로 대자보는 붙었나?
  • 이융희
  • 승인 2014.11.29
  • 호수 14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1일 사랑한대는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입시설명회를 열었다. 대학생이 될 꿈에 들떠 있는 학생들은 대자보를 보았다. 25일, 새로운 대자보가 민주광장에 붙었다. 학우들은 이야기한다.

“싸 놓은 똥이나 다 치워놓고 얘기하지 왜 새로운 대자보야.”
“또 대자보야 XX, 재미라도 들렸나.”

26일 각종 자치언론에서는 ‘최근 SNS와 자유게시판을 통해 공청회를 요구하는 학우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계획된 공청회가 변철민 전 후보의 ‘“공청회가 아니더라도 학우들이 알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많기 때문”이라며 “학우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가 결정할 권한이다”’라며 무산되었음을 보도했다.

공청회라는 건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공적으로, 그리고 소통의 통로를 통해서 대중에게 이야기를 하는 의미이다.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거, 저 대자보 말인가? 아니면 지속적으로 지적해오는 ‘8월 말경에 임의 사퇴했다가 임기를 모두 마치기로 약속하고서 돌아오기로 했는데 그 약속을 저버리고 총학선거를 위해 중도 사퇴’하기로 한 것에 어떤 대답도 없이 상대에 대한 이야기와 자기 정황을 늘어놓기 바쁘던 그 페이스북 글?

그 글은 다시 살펴봐도 사과는 ‘저희의 준비성이 부족했다’였고, 그 8월과 9월에 대한 부분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나현덕 회장이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 이유가 그것임을 대자보에서도, 한대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언급했다면 가장 나중에 적힌 사과문에서 이것이 빠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진흙탕 싸움은 끝이 없다. 지금 반으로 나눠서 싸우는 사람들은 일반 학우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모르는 모양이다. 학우들이 대자보 앞으로 가는 건 진실을 읽어야겠다는 앎의 사명감이 아니란 거, 한 발자국 떨어져서 1분만 서 있어도 알게 되는데.

누구 하나가 잘했다 못했다 말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은 알겠지만, 공청회를 ‘다른 방법이 많다’고 거절하는 행위에 어떤 신뢰를 기대해야 하나. 김부선은 기자회견을 거절하지 않았다. 다른 수단은 누굴 위하는 행동인가. 아직도 어딘가에 할 말이 남겨져 있는가. 이 상황에서, 누가 그 ‘말’에 귀 기울이나. 알고 지내는 사람 몇 정도?

앞서 지적한 부분들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문제가 아님을 주장해야 한다. 글은 은폐되는데 수단이 많아져도 뭔 이야기를 듣나. 학우들에게 알리는 수단은 ‘내가 결정할 권한’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알리고 싶은’것만 알리겠다는 이면의 욕구가 그대로 녹아있다.
우리는 알 권리 너머에 제대로 알 권리가 있고, 알기 싫은 것을 ‘보지 않을 권리’도 있다. 나붙는 대자보들을 읽게 강요하지 마라.

공청회는 대화다. 대화 너머에서 학우들이 보고 있다. 처음 나현덕 회장이 공청회를 하자고 이야기 한 것 때문에 불리한 게임이라는 판단이라도 든 것인가. 그러나 공청회는 학우들의 의견이기도 하다. 학우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학우들에게 얘기할 수단이 많다고 주장하는데, 우리는 서프라이즈한 대화 창구를 원하는 게 아니다.

대자보가 붙었을 때, 그것이 대학가의 문화로써 작동하여 소통의 창구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부의 비리, 또는 비정의를 고발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 그것이 대학생이라면.
실상은 그냥 그 어떤 정의도 없는데. 뒤늦게야 그 고등학생들에게 부끄럽다.
이융희<국문대 한국언어문화학과 11> 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