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를 다녀와서
미얀마를 다녀와서
  • 최진우 <사회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승인 2014.11.10
  • 호수 14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봉사활동 차 미얀마를 다녀왔다. 미얀마의 첫 인상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밤길은 좁고 어두웠으며, 사람들의 행색 또한 초라한 편이었다.

1960년대 미얀마에 대한 기억이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뜻밖의 광경이 아닐까 싶다. 당시 버마로 칭해졌던 그 나라는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경제발전 전망이 가장 밝았던 아시아의 총아였던 때문이다. 축구도 잘 했고 유엔 사무총장까지 배출한 나라가 버마였다. 그러던 나라가 군부 독재 하에 고립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지구상 최빈국의 반열에 오르더니 급기야 2008년 5월 인도양 판 태풍인 대규모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들이닥치자 십수만 명의 국민이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고 이백만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하는 나라가 돼 버렸다. 미얀마는 독재자의 철권통치 하에서 자원의 저주로 인한 고통을 속절없이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최근 들어 미얀마는 국제적 압력과 내부적 필요성에 의해 조금씩 문을 열고 있다. 미얀마의 국부 아웅 산 장군의 외동딸이자 민주화의 상징 아웅 산 수 치 여사에 대한 탄압 철회를 요구하는 국제적 압력이 그 이유 중 하나다. 이와 맞물려 국가적 비극을 초래한 나르기스 또한 미얀마의 개방을 촉진시키고 있다. 재난 구호를 위해 미얀마에 들어간 각국의 NGO가 철수를 거부하고 계속 남아 활동하면서 미얀마의 상황이 세계에 알려지고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인터넷 연결도 지극히 불편하고 민주화의 발걸음도 더디기 이를 데 없지만 그래도 미얀마는 조금씩 기지개를 켜고 있는 모습이었다. 양곤은 딱히 정돈된 모습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출근 시간 길거리는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로 가득 차 있었고 사람들의 표정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미얀마의 희망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미얀마인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공동체 의식에서였다. 우리가 방문한 기관은 불교 사찰이 운영하는 보육원이었다. 백 명이 넘는 어린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고아였고, 이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비용의 상당 부분은 마을 주민들의 십시일반으로 충당한다고 한다.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없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활동을 하면서도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광경을 목격했다. 인근 봉제공장의 젊은 직원 십 수 명이 토요일 오전 이른 시간부터 상품 보따리를 들고 보육원을 찾아와 미니운동회를 열어 아이들과 함께 달리고 뒹굴면서 신나게 놀아주는 모습이었다. 넉넉치 않은 형편에 일부러 시간을 내 밝은 표정으로 열심히 뛰고 즐겁게 웃던 미얀마의 젊은 청년들을 보면서, 미얀마는 풀뿌리 수준에서 서로를 돕는 네트워크가 가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미얀마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이들의 적극적 의지, 적절한 수준의 외부 지원이 결합됐을 때, 미얀마는 도약의 날을 맞이할 것으로 기대된다. 아직은 권위주의와 부패가 만연하고 있어 그 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미얀마의 잠재력이 현재화되는 날이 올 것으로 생각된다. 미얀마의 민주화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이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