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의존증
역주 의존증
  • 한대신문
  • 승인 2006.05.07
  • 호수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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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로 소개되곤 하는 애니 프루의 단편집이 발간됐다. 반갑고 궁금한 마음에 서둘러 구입하여 읽어 내려갔다.

작품 내용도 좋았지만, ‘옮긴이의 말’이 특히 인상 깊었다. 역자는 끄트머리에서 역주에 관한 그만의 원칙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원작의 나라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일이나 우리가 모를 것에만 역주를 다는 것이 옳다.” 나는 이 기준이야말로 우리나라 번역계에 널리 적용돼야한다고 생각한다. 일견 친절해 보이는 역주의 나열은 글을 읽는 흐름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독자들이 작품을 읽으면서 새로운 정보를 접하게 될 기회를 차단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물론 반드시 필요한 역주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문화적 맥락의 차이점을 알아둬야 할 상황에서의 이야기다. 프루의 단편 「와이오밍의 주지사들」에 등장하는 평화의 담뱃대가 무엇인지 알 한국인은 드물지만, 미국인은 그것의 상징성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점은 한국어판에 달린 역주로써 설명돼야 마땅하다.

이러한 원칙은 소설에서 보다 엄격하게 적용돼야 한다. 지난 달 27일 개봉한 영화 「노스 컨츄리」에는 ‘애니타 힐 사건’이 간접적으로 비춰진다. 클래런스 대법원 판사가 그의 보좌관이었던 애니타 힐 교수를 성희롱한 혐의로 기소된 이 사건은 미국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고, 영화 속 주인공에게는 어떤 행동의 계기가 된다. 물론 한국의 관객들에겐 생소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영 도중에, 단지 관객 계몽을 위해 역주로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일이 가능할까? 영화에선 화면의 연속성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역주를 상상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소설에도 이야기의 흐름이 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독자들은 집중력을 쏟는다. 원주를 넣는 경우에도 작가들은 그것이 작품의 일관성을 깨뜨릴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작업하지 않던가.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갯 번역본을 읽으면 (초판과 마찬가지로) 원주를 각 장의 뒷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좋은 번역으로 일컬어지는 김화영 교수의 「알베르 카뮈 전집」 중 ‘이방인’에도 역주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예외는 한국어에 존재하지 않는 명칭의 문제를 다룰 때 정도이다. 게다가 역자가 프랑스와 한국 간 사법제도의 차이에 불친절했던 덕분에, 나는 재판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프랑스엔 배심원제가 있으며, 그것이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때 시작됐고, 프랑스의 학자 라플라스가 배심원제에서 생길 수 있는 오심의 수학적 확률이 1만분의 1에 불과하다고 말했다는 사실 등을 새로이 알게 됐다. 이런 덤이야말로 우리가 기원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시작해 오늘날까지,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이며 책을 읽음으로써만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닌가.

포털 사이트에서 ‘지식인’서비스가 등장한 지도 4년이 지났다. 그로 인해 한국어로 된 웹상의 정보도 크게 늘어났다. 궁금증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데다 연동되는 정보까지 취득 가능한 문명의 이기를 코앞에 두고 역주를 배고파할 순 없는 일이다. 과잉 친절을 베푸는 역자는 반성할 일이고, 독자들은 역주 의존증을 버려야 한다.

김지승 <인문대·영어영문학부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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