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단일민족’은 없었다
처음부터 ‘단일민족’은 없었다
  • 정혜원 객원기자
  • 승인 2014.10.05
  • 호수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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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를 거스르는 한반도의 귀화 역사

“체격과 혼혈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조선만큼 흥미를 끄는 나라도 없으리라 여겨진다. 마치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거의 모든 인종들이 이 조그만 조선이라는 나라에 정착한 것처럼 보여진다.”

 영국인 탐험가 새비지 랜도어는 1895년에 발간된 「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통해 조선을 ‘다민족 혼혈 사회’라고 평가했다. 그는 조선 민족이 북방 몽골리안으로 주종을 이루지만 중앙아시아와 남방계 혈통 등도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상고 시대부터 한반도는 주변 국가로부터 전쟁이나 자연재해, 국가적인 귀화 정책 혹은 자발적인 이류로 많은 이주자가 정착했다.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라는 책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 있는 성씨 중 약 46%가 귀화 성씨이며 인구로는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숫자다. 귀화인의 대부분이 본래 토착인과 외모 구별이 어려운 동아시아 출신이라는 점은 ‘단일 민족’에 관한 판타지를 심화시켜왔다.

나는 언제부터 ‘민족’의 구성원이 되었나

정치학에서 보자면 민족국가(nation-state)라는 개념은 프랑스혁명에서 처음 시작됐다. 신분제를 바탕으로 한 절대주의 국가였던 프랑스는 혁명 이후 국민을 나라의 '주권자'로 명명했다. 이 가운데 피어난 ‘자신의 나라’라는 의식은 국민들이 이 나라를 공유한다는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변형됐다. 결국, 서양 기준으로 '민족'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약 300년 정도가 된다.

특이한 점은 한국 내에서 ‘민족의식’은 ‘역사적 동일성’이라는 특성을 추가로 가진다는 것이다. 대략 1천 년이상 하나의 독립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던 국가적 특성이 민족의식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본격적으로 하나의 민족의식이 생긴 것은 ‘고려 시대’로 볼 수 있다. 고려의 삼국 통일로 언어, 문화, 혈통 등에서 동질성이 강화되고 거란, 여진, 몽골 등의 이민족들과 투쟁하면서 단일 민족 국가 의식이 강화된 것이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자연히 발생하기도 하지만 국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프랑스혁명에서의 민족주의 혹은 고려 시대 이후 민족의식은 자연적인 것인 반면 19세기~20세기에 걸친 인종주의 등의 개념은 국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귀화보다 앞선 경계 없는 어울림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의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한반도 귀화 사건은 중국의 은나라가 망한 후 ‘기자’가 고조선에 망명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 가운데 하나인 청주 한 씨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바로 ‘기자’이다. 「청주 한 씨 세보」에 따르면 기자 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 후대에 살던 우성·우평·우량 삼형제가 각각 기 씨·선우 씨·한 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위진남북조시대에 전쟁이 빈발했던 중국에는 많은 유민이 발생했다. 이들 대부분은 남쪽으로 이동했는데 그 수가 전체 인구의 8명 중 1명꼴이었다. 사실 국적 의식이 모호하고 국경이 불분명했던 시기에 집단이나 개인의 이동을 ‘귀화’라고 하는 것은 조금 모순이 있지만 이들 이주민 대부분이 한반도에 정착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삼국시대를 살펴보면 신라시대에는 약 40여 개의 성씨가 귀화했다고 한다. 인도 출신인 금관가야의 허 황후나 중국 출신인 유리왕의 아내 치희도 엄밀히 말하자면 ‘귀화인’인 것이다. 고구려시대 귀화인들의 모습은 1997년에 발간된 「한민족대성보」에 등재된 당나라 팔학사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영양왕은 ‘팔학사’라는 당나라의 선진 학자들을 초대했고 이후 그들이 귀화하게 되는데 ‘남양 홍씨’가 이들의 후손이 된다.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이었고 명장으로 당나라에서 이름을 날리던 흑치상지의 사위, 순장군에 관해 2006년 11월 18일 연합뉴스는 그의 성씨가 ‘모노노베’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보도가 흥미로운 점은 백제인 흑치상지의 사위를 ‘일본인 출신’이라고 말하는 기록이 앞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즉, 흑치상지의 사위인 순장군은 중국으로 이동한 일본인 귀화인이 되는 것이다. 비록 삼국시대 귀화인들에 대한 자료는 그 수가 절대적으로 빈약하지만 많은 수의 외래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통일 시대의 대표적인 귀화인은 처용이다. 처용 탈은 보편적인 한국인의 모습과 다른 양상으로 제작되었다. 가령 한국인은 상대적으로 코가 낮고 광대뼈가 튀어나와있다. 또한 눈이 가늘고 피부색은 누런 편이다. 하지만 처용 탈은 툭 튀어나온 주먹코에 눈은 크고 쌍꺼풀이 짙다. 얼굴색은 노랗기보단 갈색이나 붉은색에 가깝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학자들은 처용을 실크로드의 동방 종착지에 도착한 아랍 상인과 연관 지어 생각하고 있다. 중세 아랍 문헌의 기록에는 당시 남해를 통해 아랍-무슬림들이 신라에 내왕하고 정착까지 했다고 서술하고 있고 신라 고지에서도 서역풍의 무인석과 토용 같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평해 구씨’, ‘남양 제갈씨’, ‘온양 방씨’, ‘영양 김씨’ 등 당나라로부터의 귀화도 계속되었다.

 

귀화, 정치가 되다

고려 정부는 적극적인 귀화 정책을 펼쳤다. 특히 고려 정부는 이들 귀화인에 대한 특전을 마련했는데 먼저 학자나 우두머리 출신의 귀화인들에게 관직을 수여했다. 이것은 고려가 중국의 선진 제도와 문물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일반 귀화인이 고려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집이나 논밭, 물품을 증여해주었다. 고려 정부는 귀화인을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새로운 인력을 국방력이나 농업 생산력 증진에 이용하고자 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고려 성종 때는 요의 압박으로 송나라와의 국교를 끊기도 했지만 이에 관해 김송희<인문대 사학과> 교수는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상황이었다”라며 “송과의 경제, 문화교류는 계속 이어져 송나라 소동파 같은 사람들은 양다리를 걸치고 송나라에서는 이익만 챙겨가는 고려를 비난하곤 했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정책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 초기에는 여진족에 대한 포섭과 격려, 결혼 정책, 강제 이주, 인질책으로 북방 경계를 강화한다는 목적에서 귀화정책이 실시됐다. 반면 조선 후기에는 귀화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 이는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면서 조선과의 경계가 분명해졌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명확해진 경계로 타 부족을 정책적으로 받아드릴 수도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서도 이들 부족을 반송시키라는 요구를 해왔다. 결국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비해 귀화인 수가 전반적으로 줄어들었는데 김 교수는 “조선 사회의 성격이 고려와 달리 폐쇄적이었던 것도 또다른 이유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05년 12월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총서 「미트콘드리아 DNA 변이와 한국인 집단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한국인을 몽골 및 동남북 시베리아 집단에서 높은 빈도로 나타나는 유전자형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와 중국 남북부에서 나타나는 유전자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이중적인 집단 형태’라고 설명했다. 앞서 2003년 일본 국립유전자협회는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의 DNA 미토콘드리아 염기배열 분석 자료를 통해 세 나라의 민족이 어느 정도 서로 공통 된 DNA를 가지고 있다고 발표했다.

▲ 2013년 통계 조사에 따르면 한국 내 외국인 이주자 비율은 2.5%에 이르며 그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활발해진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과 더불어 1998년 6월 국적법 개정으로 국내 귀화 요건이 완화되었다. 통계청은 대한민국 국민의 8명 중 1명이 국제결혼을 하고 있으며 그 비율은 증가 추세라고 밝혔다. 지금까지의 귀화인들은 중국인이 대다수를 이루는 동아시아권 내의 사람들이었다면 최근 동남아 인력을 필두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유입되고 있다. 특히 필리핀계는 145개의 성씨를 국내에 신생했고 이들은 ‘골라낙콘치타’나 ‘글로리아알퀘아포스’등 현지 성씨를 그대로 갖고 들어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상고시대 이래 현대에까지 한반도에는 수많은 외래 집단이 들어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즉 한반도에 누가 먼저 들어왔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다.

 

도움 : 김송희 <인문대 사학과>교수

도서 :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 「한국의 귀화 성씨 : 성씨로 본 우리 민족의 구성」

논문 : 「고려말의 귀화와 이슬람의 한반도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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