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한대신문사 기자능력검정시험
제 1회 한대신문사 기자능력검정시험
  • 심건후 기자
  • 승인 2014.05.10
  • 호수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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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형 - 한대신문에 남아 있는 이유에 대해 서술하시오(100점)

지금도 기사를 쓴다 <이희원 대학보도부 부장>
딱 이맘때이다. 내 이름이 적힌 첫 기사가 실렸을 때의 기쁨을 잊지 못한다. 지금 다시 본다면 얼굴이 붉어지는 기사지만 수습기자 시절, 기사를 마감한 뒤 신문으로 나오기를 주말 내내 기다렸다. 월요일 등굣길은 9시 수업이 있었음에도 신이 났고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애지문에서 신문을 집었다. 기사는 신문 구석에 작게 실렸지만 마냥 뿌듯했고 신문을 한 움큼 집어서 가족, 친구, 심지어 졸업한 고등학교에도 찾아가 나눠주며 자랑했다.

이후 수습기자가 한 부서를 책임지는 부장이 되기까지 많다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한대신문 홈페이지에 내 이름을 검색하면 수많은 기사들이 나온다. 첫 기사만큼의 설렘은 아니지만 내 이름이 달린 각각의 기사를 보다보면 취재했을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대학보도부 기자라서 가장 좋은 점은 학내 소식을 주로 취재하다보니 학교에 대해 전반적인 이해도가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기자인 덕분에 대학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불편이나 의문점에 대해 스스로 그 답을 구했을 때는 설명 못 할 쾌감도 느낀다. 지금 이 순간까지 학보사 기자로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만두지 않았던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기자 생활을 마치고 나면, 지금과 같은 경험을 다시는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매주 새로운 기사를 완성하는 것이 힘들지라도 ‘한대신문사 이희원 기자’로서 쓴 기사들과 만난 사람들과의 경험은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잊지 못할 밑거름이 될 것이기에 나는 지금도 밤을 새며 기사를 쓴다.

흑백 무성영화였던 대학생활, 한대신문이 3D 영화로 만들어주다 <전예목 학술부 차장>
작년 1학년 1학기부터 시작한 한대신문 생활이 이제 어느덧 만 3학기에 다다른 2학년 1학기 중반을 뉘엿뉘엿 넘기고 있다. 그 동안 다사다난했기에 처음에 한대신문 하면서 겪은 소회를 지면에 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별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대신문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하니 막상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할 말은 많은데 좁은 지면에 한꺼번에 나오려다 보니 ‘말의 병목현상’이 생겼나 보다.

‘도대체 이걸 왜/어떻게 하란 말이야?’ 처음 한대신문에 들어오고 나서 느낀 점이다. 왜/어떻게 이 문장을 바꿔야 하는지, 왜/어떻게 이 아이템을 기사로 써야하는지 전혀 몰랐던 내 머릿속에는 ‘왜/어떻게’라는 말로 꽉 차있었다. 게다가 내가 속한 학술부의 직속 선배가 없었던 나는 스스로 살길을 도모해야 했기에 초반의 기자 생활이 녹록치 않았다.

인터뷰가 안 잡히고, 아이템이 안 떠오르고, 열심히 준비해 온 기획이 엎어지고, 인력난으로 써야 하는 기사가 너무 많아 밤을 새고 오전 10시가 되었는데도 끝나지 않았을 때. 그럴 때마다 한대신문을 나가야지 하고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지금까지 남아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한대신문과 함께 한 좋은 추억이 많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중 당장 떠오르는 것은 작년 가을 축제 때 프레스 카드의 힘을 빌려 무대 바로 앞에서 에픽하이를 봤던 일이나 평소에 책이나 강연을 통해 좋아하던 교수님을 인터뷰해 책에 사인을 받았던 일이 있다. 모두 학생 기자가 아니라면 쉽게 할 수 없었던 일이다. 흑백 무성영화일 수 있었던 내 대학생활을 총천연색 컬러 영화를 넘어 3D 영화로 만들어 준 이. 그 이름은 한대신문이다.

중독 <김지수 문화부 정기자>
처음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대학생이 되면 꼭 해보고 싶던 일이 기자였다. 약 일 년을 고민하다 작년 2학기 말, 한대신문에 지원했고 겨울방학 내내 수습기간을 거쳐 드디어 올해 정기자가 됐다.

정기자가 된 후 정말 하루하루가 바빴다. 일주일에 3일을 회의, 마감, 조판에 보내야 하고 나머지 4일 역시 취재와 기획으로 보낸다. 그러다 보니 취재와 겹칠까 봐 친구들과 약속도 못 잡고 약속을 잡더라도 확신하지 못하는 약속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발간을 몇 주 쉬더라도 쉬는 내내 취재를 걱정하느라 마음이 항상 불편하다. 월요일에 기획안을 써갔는데 기획이 엎어졌을 때와 인터뷰를 거절당해 새로 취재원을 구해야 할 때의 좌절감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왜 내 소중한 시간을 뺏기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든 적도 있다. 이제 겨우 6개월째 인데 괜히 들어왔나? 하는 후회를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어려운 취재과정을 겪어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기사를 완성하고 새벽에 첫 차를 타고, 운이 좋으면 금요일 막차를 타고, 집에 가면서 느끼는 해방감과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또, 애지문 앞에 쌓인 신문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 좋게 신문사로 향한다. 금요일 밤을 새우며 시켜 먹는 야식과 편의점 나들이, 관행처럼 굳어진 토요일 아침 다 같이 먹는 뼈해장국도 버틸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친구들은 ‘신문사의 노예’라고 한다. 신문을 만들면서 느끼는 분노와 좌절, 후회 그러면서도 동시에 느끼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에 중독돼 오늘도 마감을 준비한다.

애증의 관계 <배정은 대학보도부 차장>
어느덧 학보사 기자 생활을 해온지 3학기째에 접어들고 있다. 입학한 직후부터 내내 해와서인지 이제는 ‘기자’라는 수식어를 빼고는 나와 나의 대학 생활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케케묵은 먼지 쌓인 신문사는 학교 그 어느 곳보다 익숙한 곳이 됐고 고3 때도 해보지 않았던 밤샘 마감도 박카스와 함께 버티며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익숙함이 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듯 신문사는 나에게 있어 한마디로 ‘애증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나는 한대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기자의 꿈을 접게 됐다. 일주일 내내 시달리는 마감의 압박, 인터뷰 일정 때문에 핸드폰을 놓지 못하는 모습과 마음대로 친구들을 만날 수 없는 상황, 취재로 인해 수업을 불가피하게 빠지는 일들 그리고 마감 하루 전에 기사가 엎어지는 경우들은 나의 멘탈을 강화하는 동시에 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나는 아직까지도 한대신문 기자다. ‘그만둬야지’하는 다짐을 수백 번 되새겨도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기자라는 직책 때문에도 내 이름이 박힌 기사 때문에도 나의 경력에 도움이 될까 봐서도 아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경험과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아마 신문사가 아니었더라면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동기 기자들과의 만남은 어느새 신문사를 떠날 수 없게 하는, 한 마디로 정이 들게 만들었다. 

아직까지도 기획안을 작성하고 취재를 하며 글을 쓰는 것은 나를 초조하고 불안하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다시 신문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사람을 만나다 <사진미디어부 정기자>
신문사 일을 하면 많은 사람을 만난다. 우리 학교 교수님, 학우, 관계자 그리고 유명인(‘휴’ 인터뷰이)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와 발표하고자 하는 것 혹은 살아온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 소재를 기자라는 신분으로 들을 수 있다. 기억에 남는 인터뷰들이 너무 많다. 군필자 특집을 할 때 ‘고무신(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여자) 특집’ 기사를 쓴 적이 있다. 당시 인터뷰이만 4명이었던 대담기사였다. 보통 한 명 혹은 두 명만 인터뷰를 해봤던 내게 4명의 대담은 나에 대한 도전이었다. 형, 누나를 대상으로 경험하지 못한 ‘군대’라는 소재를 가지고 대담을 이끌어 나가야 했기 때문에 많은 걱정이 됐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대담이 진행되고 ‘군대’ 라는 소재에 관한 개인의 연애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쓸 수 있었다. 대담을 통해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로봇 박사 한재권 박사님의 인터뷰를 할 때의 이야기이다. 로봇과 박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 인터뷰를 진행했었다. 인터뷰가 끝난 뒤에 박사님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할 수 있게 됐다. 박사님이 살아왔던 인생 얘기, 꿈에 대한 조언을 아낌없이 해주셨다. 덕분에 방황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 활동을 찾아 이번 학기부터 지역 아동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내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를 하면서 물론 글을 쓰는 방법도 많이 배웠지만, 정신적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게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또 다른 배움의 연장선이고,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내일도 인터뷰가 있다.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렌다.

신과 함께 <김은영 부국장>
이번 주는 ‘황금연휴’라는 4일간의 휴일이 있는 주간이었다. 그러나 인터뷰 기자들에게 이 말은 곧 ‘인터뷰 불가능한 날’을 뜻한다. 모두가 연휴를 즐기고 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인터뷰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한쪽을 차지했다.

심지어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도 어떤 분야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오면 ‘저 사람 인터뷰할까’란 생각이 먼저 든다. 아무런 생각이 안 날 때는 멍하니 포털사이트 메인화면을 보며 평소에는 관심 있지도 않는 전시회나 뒤적여 보는 것이다.

결국 이것저것 뒤적이다 한 인터뷰이를 찾았다. 이미 6명의 인터뷰이에게 메일을 보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기 때문에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발송 완료’ 표시가 ‘메일 읽음’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인터뷰이는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나는 고민하다 직접 전화를 걸었다. 매번 그렇듯이 응답 없는 통화음만 늘어졌다.

마감 이틀 전, 나의 조바심과 신경증은 극에 달했다. 이번에는 인터뷰이의 연구실 주소를 보며 직접 찾아갈까란 생각도 했다. 하다못해 학교 근처 카페 사장님이라도 만나볼까란 생각도 했다. 이제 정말 끝이란 생각이 들었을 때, 휴대전화로 문자가 한 통 왔다. ‘인터뷰 언제 하면 되나요?’

신이시여! 그 순간 모든 생활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휴…. 이번 마감도 무사히 건너갈 수 있었다. 정말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혹시 신문의 ‘신’은 신(神)을 뜻하는 말이 아닐까. 꼭 내 주위에 무사히 신문을 낼 수 있게 도와주는 신이 있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여태까지 올 수 없었다.

기자생활과 재미에 대한 단상 <심건후 대학보도부 정기자>
사실 나는 기자를 직업으로 삼고 싶지 않다. 그러면 왜 신문사에 들어갔느냐고 물어볼 테지만 독자들을 설득할 만한 우아한 이유는 없다. 심심했다. 한심하지만 내 인생은 항상 이렇게 흘러갔다. 조금이라도 무료해지면 모두가 만류하는 일을 하곤 했다. 20살 때의 사관학교 진학이 그랬고, 21살 때의 학사경고가 그랬다. 심심하면 재밌을 만한 짓을 내키는 대로 해대곤 한다. 뒷감당이 몹시 힘들긴 하지만.

한대신문에서 일하면 심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적중했다. 이곳은 고맙게도 심심할 틈이 없게끔 해줬다. 조금 무료해지면 일감이 생겼다. 화수분 같은 곳이다. 일이 많아 심심하지 않다는 뜻만은 아니다. 신문사의 사람들도 너무나 재밌다. 신문사의 운영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개혁가 금혜지 국장을 비롯해 돌아온 히로인 이희원 부장, 신문사 공식 귀요미 배정은 차장 등 이곳에는 좋은 사람밖에 없다. ‘또라이 보존의 법칙’은 우리 신문사 앞에서 무기력하다. 폐기되어야 할 법칙이다.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앞으로도 나 자신의 무료함을 떨쳐내기 위해 신문사에 있을 예정이다. 사람을 만나는 재미,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재미 나아가 학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좋은 기사를 쓰는 재미까지. 신문사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재미를 섭렵해 나갈 것이다. 갖다 붙인 말 같겠지만, 현장을 취재하거나 기사를 쓸 때 기자 자기 자신이 들떠야 좋은 기사가 나온다. 결국, 나를 위한 길이 독자들을 위한 길이요 한대신문을 위한 길이다. 아직은 능력이 부족해 나조차도 만족하지 못하는 기사를 써내는데 급급하지만 걱정은 않는다. 사필귀정이라, 결국은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나와 신문사의 미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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