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그 깊은 심심함에 대하여
인간, 그 깊은 심심함에 대하여
  • 이재복<국문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 승인 2014.01.03
  • 호수 13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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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심심할 틈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을 불러온 주요한 원인은 ‘네트화된 세계’에 있다. ‘지금, 여기’에서의 인간의 세계란 비트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인트라망 혹은 디지털 매트릭스의 새로운 구조 하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시히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에서 쿠사나기 소령을 통해 잘 드러나듯이 이 세계에서의 뇌는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네트(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자신의 지식과 감정(감각)을 확장하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곧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네트의 세계를 유령처럼 떠도는 껍데기로서의 나라는 존재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트화된 인간이 지니는 가장 치명적인 것 중의 하나는 그가 네트화된 세계에 대해 관조하는 반성적인 인식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다. 네트화된 세계를 관조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의 밖이 아니라 안으로 향하는 깊은 심심함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물이나 세계를 ‘머리에서 눈이 튀어 나오도록 주의(attention) 깊게 들여다보면 그것이 내 속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내 자신이 사물이나 그 세계의 의식이 되는 깊은 심심함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피로사회』, p.35)이다. 깊은 심심함과 관조에 대한 결핍은 ‘피로사회’에서 한병철이 강조한 개념이지만 그것은 이미 개념을 넘어 우리의 삶 깊숙이 침투해 있다. 

우리는 지금 ‘노모포피아(no-mobile-phobia)’ 증후군을 앓고 있다. 한시라도 모바일폰이 없으면 불안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자연 혹은 신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때의 자연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연’과는 차원이 다른 가상의 인공화된 자연이다. 이 사실은 새로운 자연이 인간을 불안으로부터 구원해줄 대상이 아니라 어쩌면 더 큰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강하게 환기한다. 일찍이 나는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비만한 이성』에서 ‘에코토피아가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디지털토피아가 유토피아인가?’라는 문제 제기를 한 바 있다. 내가 대안으로 내세운 것은 ‘에코와 디지털이 통합된 세계’이다. 나는 그것을 인간의 ‘몸’을 예로 들어 해명하였다. 인간의 몸은 생식기능을 하는 생명체이면서 동시에 비트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생명체의 동시성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으로의 치우침은 위험하며 이 둘 사이의 적절한 긴장과 이완을 통한 통합적인 사유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지금, 여기’에서의 깊은 심심함이나 관조는 디지털보다는 에코적인 차원이 보다 깊은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디지털에 대한 절대 긍정은 위험하며, 에코적인 차원에서의 그것에 대한 부정, 다시 말하면 관조와 깊은 심심함을 통한 부정의 논리가 인간을 세계의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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