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에 벌어진 훈민정음 갖고 놀기
궁중에 벌어진 훈민정음 갖고 놀기
  • 전예목 기자
  • 승인 2013.10.05
  • 호수 139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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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에서 주고받은 한글 편지

조선의 상류층은 한자와 한글을 같이 쓰는 이중적인 문자 생활을 했는데 이는 주로 한글을 사용하는 여성 계층과의 소통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왕실에서도 아내, 어머니, 시집 간 딸과 의사소통을 할 때 한글로 편지를 썼다. 그래서 주로 발신자는 왕실의 남자이고 수신자는 왕실의 여자인 한글 편지가 많다. 특히 왕은 근엄하기만 할 것 같은 인상이지만 그들이 쓴 한글 편지를 보면 한 사람의 아버지이고 또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딸바보’ 현종의 한글 편지

현대어 번역:
“새 집에 가서 밤에 잠이나 잘 잤느냐? 어제는 그리 덧없이 내어 보내고 섭섭무료하기 가이 없어하노라. 너도 우리를 생각하느냐. 이 병풍은 오늘 보내마 하였던 것이라. 마침 아주 만든 것이 있으매 보내니 치고 놓아라. 날 춥기 심하니 몸 잘 조리하여 기운이 충실하면 장래 자주 들어올 것이나 밥에 나물 것 하여 잘 먹어라”

이 편지는 궁궐을 떠나 시집 간 ‘명안공주’에게 현종이 보낸 것인데 시집을 보낸 딸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현종은 편지에 손수 꽃 그림도 그려 보내고 병풍까지도 보낸다. 명안공주에게 쓴 편지를 읽노라면 ‘딸바보’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특히 일찍이 현종의 두 딸이 먼저 죽어 셋째 딸인 명안공주밖에 남지 않았고 또 공주는 병약했기 때문에 현종은 공주를 많이 아꼈다.

‘코흘리개’ 정조의 한글 편지

현대어 번역:
상풍(가을 바람)에 기후 평안 하시온지, (숙모님의) 문안 알기를 바라옵니다. 뵌 지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보내주신) 편지를 보고 든든하고 반갑사오며 할아버지님꼐서도 평안하시다고 하니 기쁘옵니다. 왕세자의 맏아들.

정조가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외숙모에게 보낸 안부편지다. 삐뚤삐뚤한 글씨 너머로 어린 정조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어린 나이에도 계절을 언급하고 문안을 묻는 모습을 통해 안부 편지의 형식을 지키려는 노력이 보인다. 이는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죽기 2년 전에 쓴 편지라 그에게 곧 닥쳐올 슬픔과 대조를 이루는 것만 같아 애잔하다.

‘오매불망’ 숙종의 한글 편지

현대어 번역:
“밤사이 평안하시옵니까? 나가실 때 ‘내일 들어오십시오’하였더니 해창위(명안 공주의 남편)를 만나 못 떠나고 계십니까? 아무리 섭섭하여도 내일 부디 들어오십시오.”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 왕후가 시집간 누이인 명안 공주의 방에 다녀 간 후 돌아오지 않자 숙종이 궁으로 어서 돌아오라고 요청하기 위해 쓴 편지다. 오래 간만에 딸을 보러 간 어머니는 딸과 사위를 보고 할 말이 많았나 보다. 하지만 아들인 숙종은 궁에 나간 어머니가 걱정되기만 한 모양이다. 그런 숙종의 답답한 마음은 편지의 맨 마지막 음절인 ‘셔’의 모음이 쭉 늘어뜨린 것과 같았을 것이다.

전예목 기자
참고: 도서 「조선언문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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