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패망의 서곡, 노몬한 전투
일제패망의 서곡, 노몬한 전투
  • 전예목 기자
  • 승인 2013.09.28
  • 호수 13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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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헌법을 수정하려는 일본 정부가 돌아봐야 할 역사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은 (나치 정권에 의해)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이처럼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변하게 한 수법을 (일본이) 배우면 어떨까”

지난 7월 29일 밤 일본기본문제연구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일본의 아소 다로 부총리의 발언은 한국과 중국의 깊은 공분을 샀다. 나치 독일의 수법을 배워 평화헌법을 개정하자는 취지의 이 말은 현재, 일본의 제국주의 시절과 같이 군사적 행동이 가능한 군대를 갖고자 하는 정책 기조를 잘 보여준다.

평화헌법은 ‘일본 헌법’의 별칭으로 제2장 제9조항에 있는 내용 때문에 붙어진 이름이다. 제2장 제9조항에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교전권 부인 △전쟁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지 않음 △전쟁 포기가 명시돼 있어 일본이 군사력을 확대시킬 수 없음을 명시했다. 따라서 현재 일본의 군사 조직으로 인식되는 ‘자위대(自衛隊)’는 명목상의 기관일 뿐,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군대가 아니라 자국의 치안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조직에 불과하다.

하지만 최근 일본은 평화헌법을 개정해 과거처럼 교전권을 가지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동아시아의 정세에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같은 일본의 군사력 강화는 주변국에게 제2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떠올리게 해 경계의 대상이 돼 왔다.

과거에 이렇게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일본에게 결정적으로 패배의 멍울을 새긴 전투가 있다. 이 전투로 인해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전투는 바로 ‘노몬한 전투’로, 전투가 발생했던 마을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강진아<인문대 사학과> 교수는 “노몬한 전투는 파죽지세였던 일본군에게 군사적 한계를 느끼게 한 전투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는 이를 계기로 점점 몰락했다”라고 설명한다.

국경 분쟁의 비화로 시작된 노몬한 전투
노몬한 전투가 발발하기 전 일본은 아시아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 지역을 점령한 다음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세움으로써 만주 지역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런 일본의 움직임은 소련의 경계 대상이 됐고 1936년 소련은 몽골 땅에 ‘몽골인민공화국’을 건국함으로써 일본을 견제했다. 이로써 만주국과 몽골인민공화국의 국경선이 접하게 됐는데, 서로가 주장하는 국경선이 달라 노몬한 전투 이전에도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가 주장하는 NLL(Northern Limit Line)과 북한이 주장하는 것이 서로 달라 자주 교전이 발생하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로 노몬한 전투가 일어나기 전 해에는 30건 이상의 교전이 국경 지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1939년 5월 만주의 노몬한이라는 마을 근처에서 몽골군 기병대와 만주 기병대 사이에 마찰이 노몬한 전투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전의 사소한 전투와 달리 이 전투는 지속적인 병력 충원으로 상황이 가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윽고 7월에 이르러서는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노몬한 전투가 시작됐다. 먼저 일본군은 전투기를 이용해 탐사크-불라크(Tamsak-Bulak)에 있던 소련의 공군 기지에 피해를 입혔다. 이후 일본군은 23보병사단과 이를 지원하는 2개의 전차연대로 육상 공격을 감행해 소련군을 할힌골 강 너머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일본이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로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로 강 교수는 “노몬한 전투는 중일전쟁에서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공세적으로 선방하려는 일본군의 의도에 의해 발생했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일본군은 청일전쟁이나 만주사변의 사례에도 보듯이 먼저 공세적으로 나선 뒤 전쟁에 우위를 점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당시 소련 수상인 스탈린이 여러 장군들을 숙청했다는 사실을 일본군이 알고 있어 소련군의 전투력이 약화됐다고 생각한 점이다. 이 같은 일본군의 대대적 공습은 사령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닌, 만주에 있던 일본군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것이다. 강 교수는 “1936년 군부 내 쿠데타 시도가 있었던 2.26사건 이후 군부의 힘이 강해져 일단 전쟁을 일으킨 뒤 ‘결과적으로 승리만 하면 된다’라는 식의 모험주의가 만연했다”라며 “일본군 참모가 사령관 서명란에 월권으로 서명해 노몬한 전투를 확대시켰다는 설처럼 만주 일본군의 자율적이고 독단적인 공격은 흔한 것이다”라고 했다.

소련군의 진격
소련군은 다시 전세를 가다듬고 반격할 준비를 했다. 나중에 소련과 독일 간 전쟁에서 대활약해 소련의 구국 영웅으로 평가받는 ‘게오르기 주코프(Georgi Zhukov)’ 장군을 노몬한에 파견했다. 이후 주코프는 일본군을 할힌골 강 너머로 격퇴했다. 그리고 대규모 병력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해 소련군의 병력을 지속적으로 증원했다.

8월 20일에 주코프는 선제공격을 실시하고 3개 소총부대, 2개 차량 화보병부대 그리고 2개 기갑부대(전차와 장갑차와 같이 기동력과 기계력을 갖춘 병기로 무장한 부대)을 투입했다. 이때 소련군은 5만 명의 병력, 500여 대의 전차, 250여 대의 전투기를 이용해 일본군을 진지에 고착시켰다. 이후에 북익과 남익의 기갑부대를 적의 측면으로 공격하게 해 일본군 23사단을 포위했다.

적에 둘러싸인 23사단을 구원하기 위해 일본군은 지원군을 증파했지만 소련군 전차에 의해 저지당하는데, 이는 소련군 전차 장갑이 일본군의 대전차 무기로 관통될 수 없었던 탓이 컸다.

소련군의 전차가 적군의 별다른 제재 없이 활보하고 다녔기 때문에 노몬한에서 발생한 일본군의 사상자는 매우 컸는데, 사상자는 4만 명이나 됐으며 포위당했던 23사단은 73%의 병력을 손실했다.

그렇지만 일본군이 퇴각함으로써 이 전투는 소련과 일본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소련이 강력한 부대를 가졌다는 사실을 일본이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강 교수에 따르면 “소련의 우선순위는 영토 보존, 일본은 당시 진행 중에 있던 중일전쟁 승리에 있었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확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노몬한 전투의 역사적 의의는 전투 직후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에 있다. 노몬한 전투의 패배로 일본은 소련군에 대한 공포감을 가졌고 이 공포감은 이후 독일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동쪽 소련 영토를 공격하지 않았던 이유가 됐다.

일본이 소련을 공격했다면 동부전선까지 신경썼어야 했기 때문에 앨빈 쿡스<샌디에고 주립대> 교수는 저서 「노몬한: 러시아를 상대한 일본」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독일이 공격한 서부전선뿐만 아니라 동부전선까지 신경 쓰는 상황이었다면 소련의 대독일 전쟁은 실패했을 것”이라고 해 노몬한 전투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도움: 강진아<인문대 사학과> 교수
참고: 책 「아틀라스 전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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