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중요하다
상상력이 중요하다
  • 금정연<국어국문학과 00> 동문
  • 승인 2013.09.10
  • 호수 13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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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세계적인 작가가 된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다 문득, 그의 초창기 단편인 ‘빵가게 습격’을 떠올렸다. 그게 내 일이다. 어떤 책을 읽고, 다른 책들을 떠올리며, 그것들을 적당히 뒤섞어 지면을 채우는 것. 그건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아무튼 우리는 배가 고팠다. 아니, 배가 고픈 정도가 아니라 마치 우주의 공허를 그대로 삼켜버린 것 같이 속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공복감은 왜 생기는가? 식료품의 부족 때문이다. 식료품은 왜 부족한가? 적당한 등가교환물이 없기 때문이다. 적당한 등가교환물이란 무엇인가? 바로 돈이다. ‘나’에게는 왜 등가교환물이 없는가?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등가교환 이외의 것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등가교환의 논리를 따르는 한, (확률적으로) ‘나’는 영원히 배고플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단짝과 함께 빵집을 털기로 한 것이다. 늦은 오후, 대머리 주인에게 식칼을 겨누며 그들은 말한다. 배가 너무 고픈데 돈이 없다고. 주인은 태연하게 대꾸한다. 그럼 빵을 먹으라고, 돈은 없어도 되니까 마음껏 먹으라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피 끓는 청춘이다. 동정 따윈 질색이다.
그렇다면, 주인이 말한다, 빵 값 대신 저주를 하는 건 어때? 어처구니없는 제안이다. 그냥 죽여 버리자는 친구를 말리는 사이, 주인은 새로운 제안을 한다. 바그너를 좋아해준다면 빵을 공짜로 주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빵과 바그너가 무슨 상관이람?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빵을 먹는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들으며, 배가 터지도록.
 
하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 몇 년이 지난 어느 새벽, 미칠 듯한 공복감에 잠에서 깬 ‘나’는 같이 일어난 부인에게 빵집을 습격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다 문득 깨닫는다. 주인의 제안이 실은 무시무시한 저주였다는 사실을.

사정은 이렇다. 빵가게 습격 이후 친구와 멀어진 ‘나’는 학교로 돌아가 졸업을 하고,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며 사법시험 공부를 하고, 부인을 만나 결혼을 했으며, 두 번 다시 빵가게를 습격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성실한 사회인이 되어 하루하루를 꾸려간다. 한때 등가교환의 원리로 굴러가는 자본주의의 바깥을 꿈꾸었으나, 빵집 주인과의 ‘거래 아닌 거래’를 통해 저도 모르게 그 사회에 편입되고 말았던 것이다. 상상력의 패배. 그때 부인이 말한다. 지금 당장 그 저주를 해소하자고. 그렇지 않으면 영영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그들은 다시금 빵가게를 습격한다. 또 다른 단편 ‘빵가게 재습격’의 줄거리다.

그렇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으면 알 수 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고민하던 젊은 작가는 여기에 없다. 예전만큼 재미있지도 않은 작품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버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하루키를 욕할 수 있을까? 달라진 건 그뿐만이 아니다. ‘빵가게 습격’을 읽으며 상상력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새내기는, 어느덧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생활인이 되어 모교의 신문에 이런 글을 쓴다. 식료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거래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상상력의 패배.

상상력이 이렇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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