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 끝에 당신의 사랑을 적셔주세요
내 발 끝에 당신의 사랑을 적셔주세요
  • 김은영 기자
  • 승인 2013.05.28
  • 호수 13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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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

토슈즈가 아닌 맨발로 들판을 오가며 춤을 추던 무용가가 있다. 지상의 모든 것들을 온 몸으로 표현하길 좋아했던 그의 이름은 ‘이사도라 덩컨’이다. 그는 미국 출신의 무용가로 기존 엄격한 복장과 형식 아래 이뤄졌던 발레의 틀을 깬 사람이다.

정재왈<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는 “그의 춤은 형식적인 해방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저항 정신을 담아 ‘저항의 춤’으로도 불린다”라며 현대 무용 사에서 그의 춤이 갖는 의의를 설명했다. 현대 무용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정작 그의 인생은 새롭고 희망찬 미래를 그리진 못했다. 차라리 그에겐 파란만장한 비운의 여주인공역이 잘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춤을 추듯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네
그는 평생 한 남자와 지고지순한 사랑을 나눈 여인은 아니었다.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그의 사랑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그는 당대 뛰어난 머리와 능력을 갖춘 남자들과 사귀었는데 그 중 ‘에드워드 고든 크레이그’와 ‘패리스 싱어’가 있었다.

▲ 이사도라 덩컨이 춤을 추는 모습이다.
이사도라가 처음 크레이그를 만났던 당시, 그는 무용가로서 이름을 한창 날리기 시작하던 시기다. 반면 크레이그는 이제 막 날아오르기 시작한 신예 공연 예술가였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크레이그는 오직 자신의 연출 능력만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베를린의 한 공연장에서 아름답게 춤을 추는 이사도라를 보고 한눈에 반해 대기실을 찾아간다. 이 순간 그녀는 어떤 생각에서였을까. 마치 어떤 천재의 광명이라도 본 듯, 이사도라는 곧바로 그의 고백을 받아들인다. 이사도라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크레이그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여기 내 앞에 빛나는 젊음, 아름다움, 천재가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사랑의 불길이 타올랐다. 나는 그의 팔 안으로 뛰어들었다. 다시 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2년간이나 잠자고 있던 열정이 갑자기 불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로의 예술적 영혼이 다른 곳을 향했기 때문이다. 크레이그는 자신의 능력을 한층 빛내 줄 무대 속 부속물로서 이사도라를 사랑했다. 당시 무용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이사도라는 서로의 예술적 가치관을 문제로 종종 크레이그와 부딪히는 일이 생겼다. 이 문제에 관해 이사도라는 크레이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분명히 그래요. 아주 중요하고 말고요. 하지만 당신의 작품은 장치예요. 그리고 살아 있는 인간이 우선이라고요. 그 영혼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온단 말이에요. 인간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내 학교가 첫째고 그 다음이 당신의 작품이에요. 당신의 작품은 그런 인간을 위해 완벽한 배경이 되는 거에요.”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 사이의 금은 더욱 깊게 팼다. 특히 이사도라의 예술적 영혼을 헤치는 일이 있을 때는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이사도라와 크레이그는 헤어지게 되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 ‘디드르’만 남았다.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하고 있을 무렵, 이사도라는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린다. 운영하던 학교마저 흔들리자 그는 ‘나는 백만장자를 발견해야만 해요!’란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이 말이 주문이라도 된 듯, 어느 날 그에게 한 명함이 온다. ‘패리스 싱어’라고 쓰인 그 명함은 미국 재력가의 것이었다. 이후 싱어와 사귀게 된 이사도라는 그와 함께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이때 쯤 이사도라의 두 번째 자식인 ‘패트릭’이 태어났다.

이사도라는 그와 사귀면 마음 놓고 자신이 원하던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싱어와의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전날의 교훈 때문인지 이제 결혼은 이사도라와 싱어, 누구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한 말이 나올 때마다 이사도라는 “예술가가 결혼하다니 얼마나 미련한 짓이에요. 당신, 특별석에 앉아 나를 찬미하는 데 인생을 소비할 자신 있어요?”라고 되물었다. 이 대답에 싱어는 “만약 우리가 결혼한다면 당신은 순회공연을 하지 말아야지”라고 답한다. 이 대화는 파경으로 서서히 치닫는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었다.

센 강 아래 비극은 흐르고
결국 이사도라와 싱어는 서로의 입장만 확인할 뿐 의견을 좁히지는 않았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할 때마다 그들의 사랑도 조금씩 식어갔다. 이즈음 이사도라는 싱어와의 사랑보다 디드르와 패트릭에게서 느끼는 행복이 더 컸다. 그는 아이들에게 무용을 가르치며 사랑받는 여자가 아닌 사랑을 주는 어머니로서 기쁨을 느낀 것이다.

어느 날 이사도라는 아이들을 보모에게 맡기고 공연 연습을 갔다. 아이들에게 배웅할 때, 어린 디드르는 유리창에 입술을 갖다 댔다. 이사도라는 가만히 아이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에 입을 맞췄다. 유리창에 남아 있는 차가운 기운이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안 좋은 기분을 떨쳐 버리고 아이들에게 배웅한다.

이사도라가 과자를 베어 물며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를 느끼고 있을 때, 다급한 목소리가 그를 찾는다. “아이들이 죽었어!” 아이들을 실은 자동차가 다리를 건너다 그만 강둑 아래로 곤두박질쳐 버린 것이다. 당시 심정에 대해 그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울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의 나의 이상한 심리상태를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는 정말 투시력을 갖고 있어서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그 두 개의 차갑고 밀랍인형 같은 아이들이 내 아이들이 아니라 그저 그들이 벗어버린 겉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서였을까? 내 아이들의 영혼이 광명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두 아이의 죽음 이후 이사도라는 싱어와도 결별한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됐다.

▲ 이사도라 덩컨(왼쪽)과 세르게이 예세닌(오른쪽)
패트릭은 죽지 않았어
자식을 잃은 슬픔을 뒤로하고 이사도라는 다시 무용에 전념했다. 그는 죽은 아이들의 영혼은 자신의 곁에 남아 있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이사도라는 참혹한 비극을 겪어도 다시 일어나 춤을 출 수 있었다. 정말로 신이 그에게 아직 아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한 듯, 그 앞에 패트릭과 똑 닮은 사람이 나타난다. 러시아의 저항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이다.

한 화가가 주최한 파티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이사도라가 쏟은 헌신적인 사랑을 시작으로 인연을 맺는다. 이사도라는 금빛 머리칼을 가진 그를 발견하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자기 아들을 닮은 예세닌에게서 느끼는 감정이 여자로서의 사랑인지는 모르겠으나 둘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즈음, 예세닌은 오랫동안 앓고 있던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증에 시달렸고 자신을 파괴하는 고달픈 예술가의 기질을 띠고 있었다. 이사도라와 사귀긴 했지만 동시에 그에게 폭언을 퍼붓고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하염없이 예세닌에게 사랑한단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사도라가 그렇게 그에게 집착한 이유는 친구 마리 데스티에게 한 말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난 예세닌의 금발 한 올도 다치게 하는 일을 참을 수 없어. 닮은 걸 모르겠어? 그는 패트릭을 닮았어. 패트릭이 자랐다면 아마 그런 모습이었을 거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를 상처 입힐 수 있겠어?”

이사도라는 그에게 일종의 모성애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들을 쏙 빼닮은 예세닌을 이사도라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올 뿐이었다. 이사도라가 메달릴 때마다 예세닌은 그녀의 예술 정신을 조롱했다.

“무용수는 결코 위대하게 될 수 없어. 그 명성을 영원히 유지할 수 없으니까. 무용수는 죽는 순간 명성도 사라지거든.”

이 시기 예세닌은 이미 자신이 이사도라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아무도 자신의 천재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인은 말이야, 나 예세닌은 내가 죽어도 시들이 남아있거든. 시는 영원히 살아남는 거야.”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때마다 이사도라의 마음은 슬퍼졌다. 끈질긴 사랑의 집착 속에서 남은 것은 너덜너덜해진 핑크빛 기억이다. 결국 둘이 헤어진 후, 예세닌은 술로 세월을 보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후 이사도라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한다. 어느 날, 이사도라는  그가 아끼는 빨간 스카프를 매고 차에 올라탄다. 차가 출발하는 순간, 뒷바퀴에 스카프가 말리고 만다. 어떻게 대처할 틈도 없이 차는 출발한다. 이 때, 이사도라는 목이 부러져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맨발로 세상을 자유롭게 뛰놀던 그는 결국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참고 : 도서 이사도라 덩컨 「이사도라 덩컨」, 정재왈 「발레에 반하다」
일러스트 손다애 디자인기자 sohndaae@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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