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범한 배우입니다”
“나는 평범한 배우입니다”
  • 김은영 기자
  • 승인 2013.05.14
  • 호수 13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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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자성을 띠는 배우 정원조 씨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은 많지만 웃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드물다. 고요함 속에 아기같이 맑은 웃음을 지닌 사람, 혹시 정원조 씨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닐지. 배우 정원조 씨는 최근 영화 「하룻밤」을 비롯해 연극 「트루웨스트」, 「뷰티풀 선데이」, 「나쁜 자석」, 「프루프」 와 그 외 뮤지컬에 출연한 배우다. 배우라고 하기에는 솔직히 자신이 평범하지 않냐고 묻는 그의 주위엔 일반 배우와 다른 특별한 아우라가 보였다.

삶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
그의 연극 인생은 영화를 좋아하던 고등학생 시절부터 시작된다. 당시에는 영화를 즐기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배우가 꿈은 아니었다. 그냥 영화는 자신이 힘들 때 위로받고, 보고 싶은 때 볼 수 있는 취미일 뿐, 그의 인생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그는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대학 역시 그렇게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곳에 평범한 학과로 진학했다. 하루는 대학교 잔디밭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이 인생을 뒤바꿔줄 조그만 시발점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요. 그날은 막걸리를 진짜 많이 마셨던 것 같아요. 막걸리에 취해 알딸딸한 기분으로 잔디밭에 누웠는데, 문득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을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 제 마음에 연극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거죠. 이 고민을 선배에게 말했더니 아직 늦지 않았다며 다시 공부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제 나이엔 되게 고민으로 보였는데 선배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더라고요. 그 말에 힘을 얻어 연극영화과에 들어가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 재수를 결심했죠.”

그렇게 그는 우리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한다.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가 화려한 대학생활을 보냈다고 생각하기엔 이르다. 그곳에서도 그는 학교에서 종일 눌러붙어 있는 성실한 대학생이다.

“대학 때 저는 정말 모범생이었던 것 같아요. 규칙을 잘 지키는, 학교에서 좋아하는 그런 학생이요. 연극영화과 학생들은 워크숍을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곳에서 한 학기에 한편씩 공연을 해야 하거든요. 대부분 학교 수업이 끝나고 공연을 위해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모여서 연습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늘 그런 일과를 끝마친 뒤 집에 갔죠. 정말 졸업할 때까지 4년을 꼬박 똑같은 생활을 해왔던 것 같아요.”

연극영화과를 다니며 그는 당연히 졸업하면 연극과 관련된 일을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 그의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연기자의 꿈을 잠시 접어야 했던 것. 그는 어쩔 수 없이 돈을 벌기 위해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연기를 공부했던 학생에게 갑자기 토익 점수라니. 전에는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제 그는 학교의 취업지원센터를 안방 드나들 듯 자주 오가는 학생이 돼야 했다.

“취직과 관련해 아무것도 준비해 온 것이 없어서 학교밖에 믿을 곳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 위해 취업지원센터에 자주 갔어요. 학교에서 하는 모의 면접도 나가고 영어 공부도 정말 열심히 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이력서도 한 백번은 떨어진 것 같은데 결국 나중엔 대기업 여러 군데에 붙었어요. 당시에 연극영화과 학생이 일반 기업 취직에 성공한 것은 드문 일이었죠.”

좋은 회사에도 취직하고 이제 그는 적당한 돈을 벌며 살 수 있게 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딘가 부족함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녹슬어 있던 그의 나침반이 다시 작동한 것이다. 마치 지난날의 연기에 관한 진한 향수라도 남아 있는 것처럼 자꾸만 연기에 마음이 갔다.

“회사를 그만두고 극단 ‘한양 레퍼토리’의 대표를 맡고 계셨던 우리학교 최형인 교수님을 찾아갔어요. 흔쾌히 저를 맞아 주셨죠. 그때부터 배우 인생이 시작됐어요.”

연출: 정원조/ 역할: 배우1
무대에 처음 올랐던 신인 시절, 그는 샛별같이 떠오르는 배우는 아니었다. 연극 프루프와 최근 영화 ‘하룻밤’에도 자신이 아닌 다른 배우에게 스포트라이트가 갔다. 단번에 튀는 배우이기보다 그는 조금씩 스며들어 절대 물이 빠지지 않는 배우로 보인다. 처음부터 눈에 띄진 않지만, 그만의 빛깔을 지녔다. 그는 연기가 꼭 특출난 무대체질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연기라는 것이 재능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딱 봤을 때 내가 재능이 있어 보여요? 그다지 연기에 대해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보이진 않잖아요. 내가 비록 40살처럼 보이진 않지만… (웃음) 어쨌든 평범한 사람이잖아요. 예술적인 감각이 다는 아닌 것 같아요. 그거 말고도 배우가 해야 할 일들은 많아요. 감정도 중요하지만, 논리적인 사고와 깊은 이해력도 중요해요. 배우는 인간을 표현하는 직업이니까요.”
그는 배우를 ‘인간을 표현하는 직업’이라 표현한다. 배우를 보는 그만의 관점이다. 다른 사람들이 예쁘고 잘생겨야만 배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는 인간을 잘 표현 할 수 있는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이 진정한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예술의 목표라 하면, 그것도 추구하는 가치 중 한 가지일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게 전부라고 얘기할 수 있나요? 과연, 그게 다일까요? 배우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고 또 사람을 표현하는 건데. 예쁘기만 하고 이기적인 사람은 훌륭한 배우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 좋은 사람이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배우가 연기할 때 그 사람의 인품이 그대로 묻어나거든요.”

나와 연극은 자석의 극과 극
이제 그가 배우 생활을 한 지도 어언 20년이 다 돼간다. 물질적인 여유가 없어도 오직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공간에서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그 시간이 그에게 마냥 행복하다면 인간적인 인생은 아닐 것이다. 그가 이 분야에서 느낀 절망은 무엇일까.

“연기 생활도 힘든 면이 많죠. 왜냐하면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회사 생활도 고단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 일이 더 나랑 맞아요. 제가 학생 때부터 모범생이었다고 말했잖아요. 남들보다 한 시간 더 일하고, 일찍 일어나는 건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배우는 남보다 한 시간 더 연기한다고 해서 연기를 잘 하는 게 아니고 좋은 배역을 주는 것도 아니에요. 책을 많이 읽었다고, 석사까지 했다고 좋은 배우는 아니잖아요. 우리학교 연극영화과 나왔다고 좋은 배우는 아니잖아요.”

그는 이렇게 말하지만 분명 지금도 연극을 하고 있다. 80세가 다 되서도 계속 연극을 하고 싶다는 그를 보며 숨겨진 원동력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계속 연극을 하고 싶을 정도로 이 일을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딱히 이유는 없다’고 답했다.

“그냥 좋으니까 하는 거지요. 딱히 답은 없었죠.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예요. 그 답을 굳이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젊었을 때의 나는 그 대답은 멋있지 않다고 생각해서 뭔가 그럴듯한 대답을 찾으려 했는데, 이젠 그냥 좋으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는 관점이 존재한다. 이 논리가 증명된 공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사람이 정해진 법칙처럼 마음속에 새기며 살아간다. 이런 공식과 정반대의 삶을 사는 그에게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오히려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되물었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라면 하겠지요. 그런데 사실 안 하고 싶으니까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내가 연극 일을 하면 돈을 별로 못 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래도 이 일이 좋으니까 남아 있는 거지요. 그런데 만약 내가 회사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그 돈으로 여행을 다니고, 사고 싶은 걸 사는 인생이 좋다면 그런 삶을 사는 거죠. 그건 용기가 아니에요. 각자 좋아하는 삶을 선택하는 거죠.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쯤,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는 정해 둔 건 없다며 단지 이 일을 오래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도 그가 계속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에 서 있다면, 아마 그의 아이 같은 웃음도 영원히 유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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