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산골도령의 사랑이야기
어느 산골도령의 사랑이야기
  • 김은영 기자
  • 승인 2013.05.07
  • 호수 13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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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5대 임금 '철종'과 천민 '봉이'

사도세자의 비극, 고종과 구한말의 역사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역사에 그다지 관심이 없더라도 위 이름은 다들 한번씩은 들어 봤을 것이다. 하지만 사도세자와 고종 사이에 있었던 왕 가운데 철종에 관해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조선말 거칠게 몰아치는 역사의 파도 속에는 농사꾼에서 왕위에 오르게 된 철종, 그리고 그가 사랑을 약속한 여인 ‘봉이’가 있었다.

강화도에서 태어난 왕의 자손
유배자의 섬, 강화도. 섬이라서 함부로 건너올 수도 없어 유배지로 지정됐다는 강화도는 약 180년 전, 조선 제25대 임금 ‘철종’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어릴 적 궁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지내야 할 왕의 세손이 왜 시골 땅 강화도에서 자랐던 것일까. 그 이면에는 당시 흉흉했던 조정의 분위기가 있다.

원범(철종의 본명)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정조의 배다른 형제다. 정조가 통치하던 당시, 대신들은 은언군을 처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의 배다른 형제인 정조는 그를 옹호했고, 신하들의 끈질긴 상소 끝에 정조는 ‘강화도 귀양’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상황에 대해 「정조 실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비록 근교라도 잠시 내쫓아 두었다가 후일 나라의 형세가 편안해질 때 용서하고 돌아오게 한다면 삼가 분부를 받들어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심이 두려워하고 있으므로 결코 도성 안에 둘 수는 없습니다.” 「정조실록」

이때 강화도로 귀양을 가게 된 은언군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를 갔지만, 결국 세도가문의 모함으로 은언군은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은언군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전계군은 강화도에서 원범을 낳았다. 이미 무수히 많은 모략으로 둘러싸인 그의 집안에 더는 왕족의 흔적이란 없었다. 그들이 살기 위해선 그런 흔적은 일부러 없애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그렇게 원범은 왕의 피를 가졌지만, 온전히 평민의 환경에서 태어났다.

산골도령님의 풋사랑
원범은 강화도에서 평범한 농사꾼으로 살아갔다. 그가 17세가 되던 해,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겨우 이어가는 가운데, 아버지 전계군과 그의 어머니가 눈을 감는다. 이젠 고아가 된 원범과 그의 형제인 영평군에겐 조그만 초가집만 남았다.

원범이 소박한 농사꾼 생활을 이어가던 중, 같은 마을에 살던 소녀 ‘봉이’를 좋아하게 됐다. 천민출신의 그녀는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예쁘진 않았지만 수더분하게 생긴 것이 원범의 마음에 들었다. 밭을 매다가도 그녀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봉이 역시 수수했던 그가 그리 싫진 않았고, 둘은 곧 결혼을 약속한다. 약속한 나이가 될 때까지 둘은 강화도의 아름다운 바다를 배경으로 혼례식을 올리는 달콤한 미래를 기다렸다.

한편 당시 왕이었던 헌종이 후사 없이 죽어 왕실은 발칵 뒤집힌다. 세도가문이 힘을 얻어 정권을 장악하던 시기, 다음 왕위의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는 왕위를 이을 핏줄을 찾던 중, 강화도에 살고 있다는 원범을 기억해냈다. 당시 기록이 순조 실록에 남아있다.

“종사의 부탁이 시급한데 영조의 핏줄은 헌종과 강화도에 사는 이원범뿐이므로 이를 종사의 부탁으로 삼으니 곧 광(원범의 아버지 이름)의 셋째 아들이다.” 「순조 실록」

▲ 조선 제25대 임금 철종의 영정이다.
왕실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양에서 온 사신들이 들이닥쳤다. 조용한 서쪽 섬 강화도의 평화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원범은 자신을 잡아간다 생각해 연평군과 함께 자신의 초가집에 숨어 버린다.
한양에서 온 관리들은 그들을 경계하고 있는 원범을 무작정 끌어낼 수도 없어 난처한 상황에 처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이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봉이’였다. 처음엔 그 역시 원범을 잡아간다 생각해 몰래 숨어 있는 원범을 위해 밥도 갖다 주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양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나쁜 사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에 봉이는 그들과 얘기해 볼 것을 조심스럽게 권했다. 봉이의 거듭된 설득 끝에 원범은 마음을 돌렸고 곧 새로운 임금의 즉위를 알리는 봉화가 온 강화도에 퍼졌다.

제25대 임금 즉위, 새로운 비극의 시작
한양으로 떠나는 배를 타기 전, 원범은 뒤를 돌아봤다. 마치 마지막을 기약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미 얼굴은 눈물로 범벅된 채, 임금 즉위를 축하하는 행렬 속에서 봉이의 얼굴을 찾았다. 봉이 역시 그를 애타게 불렀지만, 우렁찬 북소리에 그의 목소리는 슬프게 묻혔다.

한양에서는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잠자는 곳도, 입는 옷도,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도 달라졌다. 조선의 모든 권력과 부의 꼭대기에 앉은 임금의 자리를 가졌지만, 그는 편치 못했다. 자라온 환경이 달랐던 그를 두고 왕궁 사람들은 ‘강화 도령’이라며 수군대기 일쑤였고, 그를 즉위시켰던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력들은 섭정에 나섰다. 그곳에서 그는 단지 허수아비 역할뿐이었다. 직접 정치에 나서기엔 지식도 없었던 그는 자연히 나랏일에 멀어지게 된다. 한말의 대표적 역사가 ‘김택영’은 철종이 세도가문과의 관계에서 권력을 갖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철종은 천성이 유약하고 어두운 데다가 김씨들에게 견제당해 관리 한 사람을 임명할 때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한사경」

결국 세도가문의 악행이 오랫동안 잠식하고 있던 조정에 그가 낄 자리는 없었고, 자신 또한 흥미를 잃어갔다. 기존 강화도에서 알던 사람들을 조정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실패하는 상황 속에서, 봉이를 데려온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렇게 암울한 조선의 현실에 부딪혀 철종 역시 주색에 자신을 내버리는 왕이 돼 버리고 만다. 철종이 천민 계집애를 잊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자 안동 김씨 세력이 그녀를 몰래 독살했다는 소문이 전해져 왔다. 이 소식은 암울했던 그의 생활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재위 동안, 각종 병에 시달리며 시름시름 앓다가 33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참고 도서 「철종 실록」,「철종 이야기」,「철종 대왕과 친인척들」,「한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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