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사랑이 끓어오른 예술의 온도
세기의 사랑이 끓어오른 예술의 온도
  • 금혜지 기자
  • 승인 2013.04.27
  • 호수 13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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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과 오노 요코, 그리고 비틀즈

“우리는 이제 예수보다 더 유명해졌다.” 1966년, 비틀즈 멤버 존 레논의 발언이었다. 이는 비틀즈 결성 후처음으로 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일부는 이 발언을 비틀즈의 종말로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발언이 ‘논란거리’로서 유효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비틀즈의 인기를 반증하기도 한다. 그들의 음악은 여러 장르들의 탄생과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다양한 음악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음악뿐 아니라 비틀즈는 1960년대의 사회적·문화적 혁명도 야기했다. 그런 그들의 해체는 한 시대가 막이 내렸음을 의미했으며, 그에 따른 논란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논란의 중심에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있었다.

존과 요코의 운명적인 첫 만남
도서 「존 레논, 음악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을 번역한 김이섭<연세대 독문학과> 교수는 존과 요코의 결합에 대해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자 동서양의 만남이고, 서로 다른 예술의 교류였다”고 평했다. 그들의 첫 만남은 1966년 오노 요코의 전시회에서 시작됐다. 존은 런던의 화랑들을 배회하다 런던 서쪽 끝에 위치한 인디카 갤러리에 멈춰 섰다. 그 곳에서는 일본 출신 무명 여류 예술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위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전시회 풍경은 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비틀즈로서 쌓아온 명성과 음악적 행보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던 존이 실험적인 예술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 「롤링 스톤」지에 실린 그들의 마지막 사진이다.
전시장에는 판자벽과 못 사슬에 망치를 묶어놓은 작품도 있었다. 존은 자신이 못질을 해도 괜찮은지 물었고, 요코는 5실링을 내면 못을 박아도 좋다고 제안했다. 도서 「존 레논, 음악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에 따르면 그때 존은 “차라리 대용 실링 다섯 개로 대용 못을 박겠다”고 받아쳤고, 이후 1980년에 존은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사랑에 빠지게 됐다”고 말했다. 요코는 존과의 첫만남에 대해 “내가 그 사람한테서 받은 첫인상은 얼굴이 잘 생겼다는 것이었고, 친절하고 감수성이 예민해 보였다는 점이다”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던 때는 존과 요코 모두 배우자가 있는 상황이었다. 존은 신시아 파웰과 결혼해 아들 줄리안과 함께 살고 있었고, 요코는 두 번째 남편인 앤서니 콕스와 살고 있었다.

그들의 사랑과 비틀즈의 해체
전시장에서 요코와 만난지 18개월 후, 결국 존은 신시아와 이혼했다. 요코 역시 콕스와의 결혼 생활을 끝낸 후 존과 요코는 결혼에 골인한다. 각자의 가정이 서로로 인해 파괴됐기 때문에 둘은 주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논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여성, 오노 요코」에 따르면 존과 요코가 급속히 친해지고 연인 관계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자, 비틀즈 다른 멤버들은 그녀를 싫어하게 됐다고 한다.

존은 요코 때문에 ‘녹음실에 애인을 데려오지 말자’는 멤버들간의 불문율을 깨뜨렸고, 요코는 비틀즈의 음악에 대해 비평하며 멤버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런 식으로 요코는 비틀즈의 분열에 큰 역할을 차지해 지금도 비틀즈 팬들 중 일부는 오노 요코를 ‘마녀’, ‘일본 잡귀’라고 칭하며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윤선<예체능대 실용음악과> 교수는 “많은 비틀즈 팬들은 해체의 원인으로 존과 요코의 만남을 지적하지만 그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1967년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틴의 죽음과 멤버간의 음악적 갈등이었다”며 “그들의 사랑은 비틀즈의 활동에 지장을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존 레논의 새로운 음악 세계를 열어주기도 했다”고 전했다.

비틀즈 이후의 존과 요코
둘의 결혼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은 평화 운동이다. 그들은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앉아 ‘형제들이여 평화를!’이라 외치는 퍼포먼스 「베드 인」으로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존은 이 퍼포먼스에 대해 “우린 1주일 내내 침대에 앉아 기자들과 대화를 나눴다”며 “신문 1면 기사로 평화를 위한 구애운동을 펼친 셈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존은 이런 평화적인 메시지의 연장선에 있는 곡 「이매진(imagine)」을 발표했다. 김 교수는 비틀즈 이후 존 레논의 음악에 대해 “존 레논은 오노 요쿄와의 만남 이후 보다 분명한 정치적 메시지를 음악과 퍼포먼스 아트로 표현했다”며 “그가 관심을 가졌던 아방가르드 퍼포먼스 예술을 본격적으로 진행한 것”이라고 평했다.

그들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1975년 42세가 된 요코의 아들 출산과 함께 정점을 맞이한다. 하지만 팬들에게 요코는 여전히 이방인이었고 존은 우상이었다. 팬들은 요코를 노골적으로 비난했고, 이에 대해 존은 1971년 마이클 파킨슨과의 인터뷰에서 “영국의 어느 일간지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못생겼다고 평하더군요. 하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못생겼다고 말할 권리는 없다”며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왜들 그렇게 못살게 구는 건지 모르겠다”고 분노를 표현했다.

이후 존은 1980년 마크 채프먼에 의해 암살당한다. 암살 당일 존과 요코는 건물 안에서 잡지 「롤링 스톤」의 표지 사진을 찍고 있었다. 벌거벗은 존이 다정스런 얼굴로 요코에게 기대고 있는 사진이었다. 하지만 그 건물 밖에서 채프먼은 “레논 씨?”라고 존을 불러 세운 뒤 그에게 방아쇠를 다섯 번이나 잡아 당겨 살해했다. 결국 남겨진 둘의 사진은 서로의 사랑을 과시한 마지막 순간으로 기록되고 만다.
참고 : 논문「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여성, 오노 요코」, 도서 「존 레논, 음악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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