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김은영 기자
  • 승인 2013.03.26
  • 호수 13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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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사랑했던 여자, 금홍
‘내가 그다지 사랑한 그대여
내 한평생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봤을 이 시는 이상이 사랑했던 여자 ‘금홍’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보통 이상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오감도’를 떠올릴 것이다. 다른 시보다 독특한 면이 있는 그의 작품세계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상에 대해 기이한 인상을 남겼다. 그렇다면 그 특이한 이상이 사랑했던 ‘금홍’은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여느 시인이 수줍음을 담아 고백할 만한 단아함이 묻어나는 여자는 아니었다. 금홍은 그가 요양을 목적으로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만난 ‘기생’이다. 예전부터 결핵을 앓고 있던 이상은 건강이 악화되자 총독부 건축 기사 일을 그만둔 후, 배천 온천으로 잠시 여행을 떠난다. 휴식을 목적으로 왔지만, 사흘을 못 참고 그는 주막 노인의 손에 이끌려 장구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금홍’을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이상은 그녀와 사랑을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여행을 끝내고 이상은 다시 경성으로 올라와 다방 ‘제비’를 차린다. 그리고 그곳의 마담 자리에 금홍을 앉히고 그녀와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이상은 그의 실제 일화를 담은 소설 「봉별기」에서 그들의 결혼생활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금홍이는 내 아내가 되었으니까 우리 내외는 참 사랑했다. … 우리 내외는 이렇게 세상에도 없이 현란하고 아기자기하였다.”

▲ 왼쪽부터 작가 이상, 작가 박태원, 수필가 김소운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금홍은 카페의 여주인이 된다는 생각에 반색하며 서울로 올라왔지만 그들의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홀 벽에 이상의 입선작 하나 달랑 걸려 있고 투박한 의자 몇 개만 놓여 있는 다방 ‘제비’는 차 마시러 오는 손님보다 그의 측근들로 채워지기 일쑤였고 외상값은 날로 늘어갔다. 게다가 이상도 낮엔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고 밤에 잠깐 나오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금홍은 지금의 생활과 이상이 자신에게 주는 사랑, 모두 만족스럽지 않았다. 얼마 안 가 그녀는 다시 예전처럼 다른 남자와 함께 밤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나 이상은 보통 남편처럼 그런 그녀의 행위를 비난하지 않았다. 이런 이상과 금홍의 생활은 「봉별기」에 묘사돼 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금홍이 오락의 편의를 돕기 위하여 가끔 P군 집에 가 잤다. P군은 나를 불쌍하다고 그랬던가싶이 지금 기억된다. … 이런 실없는 정조를 간판 삼자니까 자연 나는 외출이 잦았고 금홍이 사업에 편의를 돕기 위해 내 방까지도 개방해 주었다. 그러는 중에도 세월은 흐르는 법이다.”

이상은 그녀의 행동에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혹은 자신의 나태한 생활을 깨우치기 위해서 그녀가 그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돈도 못 벌어오고 늘 방에 앉아 있는 자신에게 벌을 주려 했던 것이라 믿었다. 고은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가 쓴「이상 평전」을 보면, 금홍 역시 처음에 그에게 느꼈던 기이한 매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쓸 만한 물건을 하나도 못 가진 병신이야. 게다가 돈도 벌 줄 모르는 머저리지 뭐야”라며 다방 종업원에게 대놓고 말하기 일쑤였다고 쓰여 있다. 둘 사이의 균열된 금은 예상보다 빨리 전개됐다. 이윽고 그녀는 이상이 잠시 집을 나간 사이 그를 버리고 달아났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이상은「봉별기」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하루 나는 제목 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 나흘 만에 와보니까 금홍이는 때 묻은 버선을 윗목에서 벗어놓고 나가 버린 뒤였다.”

자기애가 빚어낸 사랑
약 2개월간의 이상과 금홍의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그때의 경험은 이후 이상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소설「날개」,「봉별기」,「진주회시」등은 실제 그가 금홍과 지냈던 생활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영향력은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소설에서 이상은 항상 ‘온전히 사랑하는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가 희생적인 사랑을 했기 때문에 그런 관계가 만들어진 게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여자를 사랑하는 감정을 ‘자신을 관찰하는 도구’로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조두영 <서울대 신경정신과>교수는 “어렸을 적부터 ‘흰둥이’라고 불리었을 정도로 유난히 흰 피부에, 한국인 치고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이상은 스스로 도취한 나르시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거기에 우울한 가정사가 더해져 그는 당대 현실과는 거리가 먼, 다른 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자신만을 위한 문학을 해왔다. 사실 그의 문학은 당대 일제강점기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대응했던 문학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현실인식보단 자신의 자아를 그리는 데 몰두한 작가였다.

하지만 금홍을 만나게 된 후, 그는 그녀를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삼는다. 그리고 그 거울을 통해 그의 자의식이 조금씩 무너져 가는 것을 지켜본다. 소설 「날개」의 주인공 ‘나’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걸 목격하고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심지어 맞기까지 하는 비정상적인 관계는 그의 실제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에 관해 고 교수는 “이상은 날개의 주인공 ‘나’가 정착할 수 없는 황량한 도시의 소외 상황을 설정했다”며 “그 안에서 ‘나’의 박제된 자아의식의 심리적 치매 현상을 … 이상의 자전적 성감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소설 속에서 아내를 외부와 연관시키는 매체로 사용했고 그녀에게 소외된 ‘나’의 모습을 마치 ‘시대에서 멀어진 자신의 모습’에 비유했다고 볼 수 있다. 고 교수는 “이상은 그의 의식이 어떻게 패배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금홍이라는 본능, 수단의 표기물을 음울하게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라며 이상이 금홍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설명했다.

참고: 도서 이상 「봉별기」, 고은 「이상 평전」
논문 조두영 ‘정신의학에서 바라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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