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를 사랑한 또 다른 예술가의 이야기
‘나쁜 남자’를 사랑한 또 다른 예술가의 이야기
  • 금혜지 기자
  • 승인 2013.03.09
  • 호수 13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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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연인, 구보타 시게코
1963년 6월 초의 아침, 시게코는 「요미우리 신문」에 ‘파괴의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백남준을 알게 된다. 그녀는 기사를 정성껏 잘라내 벽에 붙여놓고 날마다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을 언젠가 내 남자로 만들고 말겠다’는 주문과 함께. 이듬해 5월, 시게코는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고 구두에 물을 담아 마시는 백남준의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관람했다. 이 공연 후 찻집에서 여러 친구와 함께 모임을 한 것이 둘의 첫 만남이었다. 시게코는 저서 「나의사랑 백남준」에서 그때의 백남준을 “고상한 척하지 않고 저잣거리의 속된 유머를 거침없이 구사하면서도 지적인 매력과 왠지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함이 묻어났다”고 회상했다.

▲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의 모습
1964년 시게코는 도쿄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전시장에 구겨진 신문지를 산처럼 쌓아놓고 위에 흰 천을 덮어 벽 위쪽에 청동 조각상을 설치한 「연애편지」라는 작품은 평론가들에게 외면받았다. 하지만 백남준은 “당신 작품이 아주 창의적이고 독특해서 좋았다”며 “일본 여자들은 대개 작고 섬세한 작품을 하던데 당신 것은 독특하게도 스케일이 큰 작품이더라”라고 말했다. 시게코는 이 말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예술을 추구해보겠다는 다짐과 함께 뉴욕으로 떠난다.

백남준과 시게코는 1960년대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흐름인 ‘플럭서스 운동’의 모임에서 만나게 된다. 백남준이 뉴욕에서 「오리기날레」라는 공연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할 때 시게코는 뜻밖의 초대를 받는다.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을 보러 오라는 백남준의 초대였다. 공연이 끝나고 일행이 흩어지게 되자 집 방향이 같았던 두 사람은 자연스레 함께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리고 그날 밤, 구보타 시게코의 오랜 짝사랑이 드디어 응답을 받는다.

도서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에는 “그들은 공장지역이었다가 폐허가 된 커낼 가 주변에 살면서 가난한 연애를 했다”고 서술돼있다. 백남준은 전위적인 공연으로 세간의 시선을 끌기는 했지만, 돈을 많이 버는 예술가는 아니었다. 1977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의 비디오아트 과목 강사 자리를 얻을 때까지 일자리도 없었다. 그런 그와의 생활을 위해 시게코는 뉴욕에 있는 일본인 학교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백남준은 결혼도, 아이도 원치 않았다. 아이가 생기면 부양의무 때문에 예술에 전념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뉴욕생활 중 백남준은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라는 퍼포먼스 아트를 시작한다. 이 작품의 오브제가 된 여성 샬럿 무어맨은 줄리어드 출신으로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첼리스트였다. 백남준은 샬럿과의 순회공연을 위해 뉴욕을 비우는 날이 잦아졌다. 이런 시간이 흐를수록 시게코의 외로움은 더해갔다. 시간이 흐른 2002년 7월, 미국 뉴욕타임스 기자가 인터뷰에서 “샬럿과 자주 퍼포먼스를 함께 했는데 ‘애정’ 관계는 없었느냐”고 묻자 그는 “독일에서 한 번 있었지. 주차된 차 안에서…”라고 익살을 떨며 “아내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시게코는 유태인 작곡가 데이비드 베어먼의 고백을 받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너는 훌륭한 예술가야. 너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라며 시게코에게 청혼을 한다. 시게코는 백남준과 샬럿과의 관계에 대한 의심 때문에 심적으로도, 넉넉지 않은 형편에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시게코는 백남준에게 이 사실을 말한다. 그의 강한 부정을 기대하며 데이비드와 결혼해야 하냐고 물었다. 백남준은 “그래, 데이비드와 결혼해. 난 결혼 같은 것과 맞지 않는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시게코는 큰 상처를 입고 데이비드와 결혼하지만 결혼 생활은 시댁과의 갈등 때문에 3년만에 끝난다.

다시 만난 시게코와 백남준은 처음 만난지 14년 후인 1977년에 결혼한다. 결혼 전, 시게코는 아이를 갖고자 했다. 하지만 반년 이상 노력해도 소식이 없자 병원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자궁에 암이 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충격에 휩싸여 일본으로 돌아가려 할 때 백남준은 뜬금없는 청혼을 한다. 시게코는 그의 저서 「나의사랑 백남준」 에서 ‘혹시 결혼 퍼포먼스를 하는건가’ 물어보고 싶었을 정도로 울컥했다고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은 아이도 갖지 못하는 여자라고 하자 백남준은 “괜찮아. 난 아이 가질 생각이 없어. 예술하고 작품 만드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라고. 그리고 나 닮은 아이 태어나면 골치만 아프지”라며 다시 청혼했다. 그들은 시간와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뉴욕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다음날 시게코는 자궁 적출 수술을 받았다.

둘의 결혼생활 중 비디오 우주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큰 화제를 얻으며 백남준은 세계적인 예술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96년 4월,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시게코는 그의 재활치료를 돕는데 힘쓴다. 덕분에 백남준은 자신의 「구겐하임 회고전」 을 성공적으로 마치기도 했다. 그러던 2006년 1월 29일, 마이에미에서 여느때처럼 저녁을 먹고 잠들었던 백남준은 급하게 생을 마감했다.

구보타 시게코는 저서 「나의사랑 백남준」 의 에필로그에 “스물 일곱에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별처럼 멀리있는 예술가였다. 저렇게 빛나는 남자를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느냐고 친구가 물었을 때, 나 역시 치열한 예술가가 돼 그에게 닿겠노라고 다짐했었다”라고 전한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우주처럼 심오했던 남자, 백남준과 함께한 삶에 감사한다”는 말로 자서전을 마쳤다.     

참고: 도서 구보타 시게코「나의사랑 백남준」
 이용우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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