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사랑한 이름] 백석의 가슴에 난초(蘭)로 남은 여인, 박경련
[그가 사랑한 이름] 백석의 가슴에 난초(蘭)로 남은 여인, 박경련
  • 정혜원 기자
  • 승인 2013.03.05
  • 호수 18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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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통영에는 동백나무가 아름드리 서 있는 ‘충렬사’라는 낡은 사당이 있다. 이 사당에서 조금 안쪽으로 길을 걷다 보면 고즈넉한 기와집이 하나 보인다. 바로 명정동 396호 ‘박경련’의 집이다. 박경련의 다른 이름은 ‘란(蘭)’으로 백석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운명의 여인이었다.
 

▲ 영생고보 영어교사 시절의 백석이다.

백석의 시 「동뇨부(童尿賦)」에서 시인은 자신의 유년기를 ‘봄철날 하루 종일 들에 나가 노곤하니 불장난을 하는 날이면 반드시 이부자리에 오줌을 싸곤…’했다고 표현한다.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커다란 범 한 마리가 선산으로 들어오는 태몽’과 함께 태어났다. 이 소년은 오산고보(오산고등학교) 시절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1926년 백석이 3학년 때의 일이었다. 오산고보를 졸업한 백석은 1930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그 모와 아들」이라는 단편 소설로 화려하게 등단하고 일본유학 후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백석은 당대의 천재 시인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특히 1936년 발행된 시집 「사슴」은 품귀 현상이 일어날 만큼 큰 돌풍을 일으켰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깜앟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1936년 조선일보에 발표된 그의 수필 「편지」는 사랑에 빠진 24살 청년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백석과 란이 처음 만난 것은 백석의 절친 허준의 결혼 축하 회식이었다.

책 「시인 백석1」은 백석이 란을 만나기 위해 이듬해 1월 다시 통영을 방문하는 모습을 생생히 서술하며 백석의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다. “이화고녀(이화여자고등학교)에 다니는 란이 방학을 맞아 고향인 통영에 내려가자 백석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만나러 간다. 조선일보 백석’이라는 전보와 함께 통영으로 달려가지만 란이 서울로 돌아가 버리는 바람에 둘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연이어 백석이 발표한 세 편의 「통영」은 통영의 모습을 서정적인 시어로 아름답게 표현하면서 한 여인에 대한 젊은 청년의 풋풋한 사랑을 보여준다.

그 해 12월, 백석은 란에게 청혼을 하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다시 통영을 방문한다. 하지만 란의 집안에서는 백석의 집이 가난하고 그의 어머니가 기생의 딸 혹은 무당 딸이라는 소문때문에 백석을 완강히 반대했다. 하지만 이보다 백석을 더 낙담시킨 것은 얼마 뒤 란이 신현중과 혼례를 올린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애국지사로 명망이 높았던 신현중은 백석과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서울과 통영을 오가며 딸에게 구혼하는 청년이 궁금했던 란의 어머니는 친오빠인 죽사 서상호에게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서상호는 후배인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물어보았고 신현중은 백석에 대한 것들을 상세히 말하며 앞서 말한 소문들로 ‘백석이 란의 신랑감으로 부적당하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이 순간 신현중은 스스로 “어르신, 제가 하면 어떻겠습니까?”라는 말과 함께 란의 신랑감이 될 것을 자처한다. 소문난 애국지사이자 후배이며 안정된 직장을 가진 신현중은 란의 신랑이 되고 한순간에 백석은 사랑하는 여인과 친구 모두를 잃게 된 것이다.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서 백석은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 한다’라고 말한다. 또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이 그녀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식사하는 모습을 그리며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애절함과 쓸쓸함을 담고 있다.

고형진<고려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사랑’은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삶을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으로 백석의 경우 통영 출신의 ‘란’이란 여자에 대한 연정이 그의 시심 촉발과 시 세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라고 평가했다. 또 백석이 남긴 여러 기행시와 연시 그리고 헤어진 이후 인생의 본질을 돌아보는 시들을 언급하며 “그의 시 중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흰 바람벽이 있어」도 그렇게 탄생한 시”라고 말했다.

백석의 시는 시적정조나 언어의 차원이 아닌 문학적 소재나 대상, 이야기까지 포괄하였을 때 ‘여성 지향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고 교수는 “한 시인의 시적 특징을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애매하며 대부분의 시인들은 좀처럼 그러한 이분법적인 틀 안에 들어가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다만 “우리 시의 가락과 정서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여성적인 느낌과 분위기를 많이 풍기고 백석의 시도 전통 시에 닿아 있기 때문에 백석의 시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후 남한에서는 1948년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시를 끝으로 더 이상 백석의 작품이 발표되지 않았다. 백석이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분단을 맞았기 때문이다. 백석의 북한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윤동주, 정지용, 박목월 같은 보통의 문학인들이 아동 문학에서 일반 문학으로 건너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비해 백석은 일반 문학에서 아동 문학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도서 「시인 백석1」 , 「시인 백석2」 , 「시인 백석3」, 「백석 평전」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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