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역법도 만들었다고?
세종대왕이 역법도 만들었다고?
  • 고석균 수습기자
  • 승인 2013.01.07
  • 호수 137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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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독자적인 역법, 칠정산을 만나다

고대의 역법, 중국을 따르다

▲ 조선의 역법서인 「칠정산 내편」(왼쪽)과「칠정산 외편」(오른쪽)이다.

우리나라 고대의 역법은 중국의 역법을 그대로 사용했다. 중국은 기원전 104년 한나라 때 태초력을 제정함으로써 달력을 만든다. 태초력은 한나라 무제 때 역법을 담당하는 사마천이 기존 역법의 개혁을 주장해 만들어졌다.

중국에서는 전한의 무제가 실시한 태초력을 시작으로 청조에 시헌력이 시행될 때까지 수많은 역법의 개량과 변경이 있었다. 역법의 개량에서 주가 된 것은 태양과 달의 움직임이 바탕인 태음태양력이다. 따라서 주로 중국의 역법을 받아들인 우리나라에서도 1896년 태양력을 사용하기 전까진 태음태양력이 오랫동안 사용됐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태음태양력이 사용됐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옛 문헌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때 내사마 덕복이 당나라에서 역법을 익혀 와 처음으로 이를 적용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시대에는 당에서 만든 선명력이 건국 초기부터 사용됐다. 이 역법은 당나라의 서앙이 만들어 당나라에서 823년부터 71년간 사용한 역법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이 역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선명력은 원의 수시력이 채용된 1309년까지 400년이 넘는 오랫동안 사용됐다.

수시력은 선명력보다 정밀한 역법으로 1291년 왕통에 의해 도입됐으나 자세한 계산방법은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서 배워왔다. 공민왕 때부턴 명의 역법인 대통력을 사용했지만 ,수시력의 계산법을 그대로 사용해 수시력 계통의 역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의 칠정산, 최초의 독자적인 역법
우리나라가 중국의 역법을 그대로 따르자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제일 큰 문제는 우리나라의 시간과 중국의 역법이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역법의 측정지가 중국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종은 1412년 이를 보완하고자 집현전 학자들에게 새로운 역법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칠정산이다. 논문 「한국 전통 천문수학의 발달과정 : 역법을 중심으로」에서 세종은 먼저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간의대를 세워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와 동짓날의 정확한 시각과 주기를 찾아내는 규표, 방위 지정표인 정방안과 같은 기구를 설치하고 별자리를 비롯해 일출과 일몰, 일식과 월식, 혜성과 행성의 운행을 관찰하게 했다. 그리고 1442년 마침내 조선의 실정에 맞는 역법서인 「칠정산 내편」과 「칠정산 외편」을 완성했다.

내편은 중국에서 받아들인 동양의 천문학 전통에 기초한 계산법을 제시하고 외편은 아라비아의 천문학 전통을 활용한 계산법을 담고 있다.

「칠정산 내편」에는 한양을 기준으로 한 동지와 하지 후의 일출입 및 주야시각에 대한 수표가 실렸다. 한양을 표준으로 실측 추산한 내편은 세종 이후 역서 편찬의 기반이 됐다. 내편에서는 1년을 365.2425일, 1달을 29.530593일로 정하고 있는데, 이 수치들은 현재의 값과 유효 숫자 여섯 자리까지 일치할 정도로 정확하다.

「칠정산 외편」은 당시 최신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권의 계산법인 회회력을 우리 실정에 맞게 사용했다. 때문에 중국 재래의 역법과는 계통이 다르다. 특히 천문 상수와 계산 방법에서 수시력과 전혀 다르다. 내편이 원주를 365.25도, 1도를 100분, 1분을 100초로 잡고 있으나 외편은 원주를 360도, 1도를 60분, 1초를 60초로 한 새로운 방식을 수용했다.

칠정산의 가치
우리나라가 최초로 독자적으로 만든 칠정산은 그 가치가 무궁무진하다. 우선 칠정산은 동서양의 천문학 전통을 고루 소화해 낸 “한국형” 천문 계산법이다. 실제로 「칠정산 내편」 3권은 수시력과 대통력을 소화해 재정비한 역작이며, 사용하는 수치가 모두 한양의 위도를 기준으로 했다는 점에서 역법의 정확도 또한 높다.

 우리 민족은 역사상 최초로 우리의 실정에 맞는 천문 계산 기술을 확보해 세종 이후의 천문학자들은 외국의 천문 역법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일식과 월식을 예보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양반 출신만이 아닌 중인 출신의 젊은 과학자들도 등용해 학문 연구에서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 자세를 보여 조선 중기 과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역법이다.

참고 : 논문 「한국 전통 천문수학의 발달과정 :
역법을 중심으로」
사진출처: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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