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치유와 교감이 필요한가?
왜 지금 치유와 교감이 필요한가?
  • 이형중<의대 의학과> 교수
  • 승인 2012.12.02
  • 호수 13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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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healing(치유)의 시대다. 연예인, 운동선수, 하다못해 교수님과 정치인들까지도 방송에 출연해 공공의 영역을 사적인 노변정담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 근래 힐링이란 말은 힐링푸드, 힐링뮤직, 힐링트레블 등 도처에 사용된다. 사람들은 왜 아파하고 또 치유가 필요한 걸까?

IMF 이후 2000년대 초반부터 불었던 웰빙 바람은 “좀 더 건강하게 살아보자.”라는 함의에서 비롯됐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건강을 “단순히 질병이나 병이 없는 수준 이상의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완전한 웰빙 상태”라고 정의했다. 웰빙, 혹은 안녕(安寧)이란 결국 포괄적인 생활의 질 향상을 칭하면서 명품열풍에 탄력 받아 성공적인 상업화에 연착륙했다.

베이비붐 세대가 전면에서 후퇴하고, 자녀인 대학생들은 등록금으로 옥죄이고 졸업해도 취직자리가 없는 암담한 무저갱의 대물림이 펼쳐지고 있다. 얼마나 희망이 없기에 어렵사리 결혼해 애를 낳지도 않고, 나이든 부모가 치매나 난치병에 걸리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할까?

평범한 중산층이 돼 눈치 안 보고 살고자 하는 소박한 희망뿐인데도, 오늘 우리 사회구성원들은 사방이 꽉 막힌 플라스틱 통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실험용 생쥐처럼 불안하고 한치 앞을 모른 채 위태롭기만 하다.

삶의 불행은 절대성으로 부여된 가치의 부재보다는 상대적인 기회의 박탈이나 이로 인한 비교우위에서 오는 열등감에 기인한 바가 클 것이다. 장기적 경기침체는 필연적으로 돈, 명예, 사회적 지위 등 기존의 가치를 참된 인간관계에 대한 성찰이라는 변곡점으로 이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막강한 인터넷과 SNS가 이끄는 검증도 되지 않은 무자비한 뒷담화의 확대재생산은 수많은 오해와 불신을 양산하며 사람들을 병자로 만든다. 한정된 파이를 나누어야만 하는 좁디좁은 경쟁사회에서 커피를 마시며 떠드는 옆의 동료, 선후배는 더 이상 막역한 부담 없는 사이는 아니다. 롤러코스터를 탄 채 현기증을 느끼게 되는 성과제일주의의 피로사회는 수많은 우울증환자와 낙오자를 양산하게 됐다.

피부에 난 생채기는 곪아서 밖으로 터져 나오면 치료가 되지만 가슴속에 박힌 고름 덩어리는 약이나 칼로도 없어지지 않는다. 억울함을 밖으로 토해내고 울 수만 있다면, 그저 귀담아 들어 주기만 해도 해소가 될 터인데, 누구에게 속 시원히 토로해야 할지. 화자(話者)와 듣는 이의 교감은 치유와 안녕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두 팔을 아래로 내려 무방비가 된다면 나에게 누군가는 귀를 열고 팍팍한 세상을 견뎌낼 힘을 주지 않을까?

시인 유하의 ‘세상의 모든 저녁’ 중 한 구절을 읊조려 본다.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기에 오래 견디어 낸 상처의 불빛은 그다지도 환하게 삶의 노을을 읽어 버린다. 이마 하나로 허공을 들어 올리는 물새처럼 나 지금, 다만 견디기 위해 꿈꾸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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