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평가, 무너지는 신용
흔들리는 평가, 무너지는 신용
  • 박수빈 수습기자
  • 승인 2012.12.01
  • 호수 13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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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평가사의 위기, 그 대안을 묻다
‘신용평가’란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 그 사람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측정하는 것이다. 신용평가사(이하 평가사)는 투자자를 위해 국가나 여러 기업의 △주식 △채권 △유가증권의 안정성 △상환능력 등을 평가해 신용등급으로 나타내주는 역할을 한다. 평가 대상에는 국가와 기업 등 모든 기관이 포함된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을 비롯한 투자가들은 평가사들이 매기는 등급을 지표로 삼아 안전한 곳에 담보를 쌓고 투자를 한다. 세계 경제의 안정이 평가사들의 손에 달린 상황에서 평가사들은 국가나 기업의 신용도를 감독하고 사실상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른다.

세계 3대 평가사에는 △스탠더드앤푸어스(STANDARD&POOR'S, 이하 S&P) △무디스(Moody's) △피치레이팅스(Fitch Ratings)가 있다. 평가사들은 투자자들에게 투자처에 대한 정보를 수치화해서 신용등급으로 제공한다. 이로써 투자자와 투자처 사이에 발생하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완화해준다. 1929년 발생한 미국 대공황 시기에 평가사들이 높은 평가를 매긴 채권일수록 부도율이 낮다는 사실이 투자자들에게 알려지면서 평가사들의 위상은 높아졌다. 그러나 장클로드 트리셰<유럽중앙은행> 총재는 “현재 신용평가 시스템을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라고 말하며,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 또한 “독자적인 평가사 설립 계획을 열렬히 지지한다”며 비판하고 있다. 세계 금융시장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평가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국제적인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평가사들이 이 같은 평가를 받게 된 결정적 계기들이 있다. 첫 번째는 2007년 초에 미국에서 발생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다. 미국 정부가 국민에게 주택자금을 빌려주는 대출 종류는 신용등급이 높은 고소득층을 위한 프라임모기지, 신용등급이 낮은 저소득층(이하 서브프라임)을 위한 서브프라임모기지(이하 모기지)로 나뉜다. 당시 미국의 금융 밀집 구역인 월가의 은행(이하 모기지 업체)들은 대출자가 빚을 갚지 못하더라도 담보로 잡은 집을 팔면 자금이 회수된다고 생각해 서브프라임에게 대출을 해줬다. 이에 3대 평가사는 자금의 유동성을 높이 평가해 서브프라임계층을 위한 모기지 업체들에게 높은 신용등급을 줬고 모기지 수요가 많아지면서 모기지 업체들은 채권까지 발행해 서브프라임에게 대출을 해줬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집값 안정을 위해 금리를 20차례 이상 올렸다. 집값은 상승하지 않고 금리만 크게 오르자 서브프라임은 이자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했다. 이에 대출 금리를 받지 못한 모기지 업체들도 잇따라 도산하게 된 것이 바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다. 그런데 3대 평가사는 2007년 말에야 모기지 업체들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기 시작했다. 평가사들이 위험이 눈앞에 닥쳐서야 신용등급을 조정해 금융위기를 오히려 증폭시킨 것이다.

두 번째 계기는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발생했다. 평가사가 신용평가의 수수료를 부담하는 월스트리트의 비위를 맞추느라 부실 위험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평가사들이 신용평가를 하면서 평가대상에게 수수료를 받는 영업수익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 평가사 이사진의 대부분이 평가를 받는 고객사의 임원을 겸하고 있어 압력과 로비가 개입할 여지 또한 충분하다. 그러나 신용평가 과정은 철저하게 기밀에 부쳐지기 때문에 이 문제를 확인할 길이 없다. 주동헌<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는 “평가 대상인 국가의 GDP와 같이 지표상으로 볼 수 있는 자료도 충분한데 평가사들은 그 나라의 금융 업계 사람들에게 경제에 관련한 브리핑을 듣고 그들과 대화를 하는 등 ‘분위기’를 본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3대 평가사들은 지나친 서구 선진국 위주의 평가 관행으로 아시아 신흥국 등 다른 지역 국가들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이에 세계 각국에서는 신용평가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평가사와 평가대상의 이해가 상충되는 것을 줄이는 방향으로 행동 규범을 정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2010년 9월에 통과된 「금융개혁법」에서 미국은 모든 금융사에 대한 평가·감독 과정에서 평가사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나가고 기존 평가사와 별도로 정부 차원의 독립적인 평가사를 신설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또 신용평가 방법론, 과거 실적자료 등을 공개하고 신용등급 산정모형에 대해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개선하는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 신용평가 업계에서는 이런 대응이 자율성을 해치고 오히려 시장을 왜곡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EU에서는 세계 3대 평가사 업체들이 금융시장의 불안을 조장한다고 확신해 이들에 대한 직접 감독권 행사를 의무화 했으며 투명성 관련 규정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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