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건반으로 만날 수 없는 12율
피아노 건반으로 만날 수 없는 12율
  • 강지우 기자
  • 승인 2012.11.03
  • 호수 13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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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삐뚤한 음들의 사이에 숨은 국악의 미
▲ 12율은 서양의 12음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음악에서 ‘음’이라고 하면 선뜻 떠오르는 것은 ‘도, 레, 미…’의 서양 음계다. 우리나라 음악에도 음계가 있을까? 만약 당신이 ‘중임무황태’라든가 ‘궁상각치우’ 정도를 생각해낸다면 조금은 아쉽다. ‘궁상각치우’는 중국의 음들이고 ‘중임무황태’는 우리 전통음악의 음이름 중 일부다. 우리나라 전통 음을 ‘율’이라고 하고 그 율의 이름을 ‘율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율은 총 12개로써 ‘12율명’이라고 한다.

12율은 ‘삼분손익법’이라는 원리로 정해졌다. 음높이는 시기와 나라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삼분손익법은 주로 동양에서 이용됐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삼분손익법의 양상이 보이지만 고대 중국에서 발달해 우리나라와 일본까지 전해졌다. 삼분손익법은 말 그대로 ‘3등분을 해 줄이고(손損) 또 더하는(익益) 방법’이다.

음높이를 정하기 위해 쓰던 원통형 관을 ‘율관’이라 하는데 조선 세종 때 ‘황종율관’을 기본으로 정했다. 황종율관 그 자체에서 나는 소리가 ‘황종’ 음이다. 그리고 이 율관을 3등분한 후 1/3을 버리면(삼분손일) 관이 짧아져 높은 소리가 나는데 이를 ‘임종’ 음이라 한다. 그리고 임종의 길이에서 3등분을 한 후 1/3을 더해(삼분익일) 4/3의 길이로 만들면 황종보다는 짧지만, 임종보다는 긴 관에서 소리가 나는데 이 음을 ‘태주’라고 이름붙인다. 이런 식으로 3등분을 해 빼고 더하는 규칙을 반복하면서 12개의 음을 정했다. 이렇게 생긴 12율을 낮은 음부터 순서대로 나열하면 ‘황종,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이다. 표기를 하거나 말할 때는 앞에 음만 따 ‘황, 대, 태…’라고 한다.

12율은 상황에 따라서 율 자체의 음정이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 즉 ‘황’을 기본음으로 하는데도 그 자체의 음높이는 악곡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 ‘향악’은 순수한 한국의 음악으로 황이 서양음의 내림마(E♭)에 가깝다. 반면 중국에서 들여온 음악인 ‘당악’의 황은 서양음의 다(C)에 가깝다. 이 차이는 악곡을 잘 아는 경우만 느낄 수 있고 악기 편성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가야금, 거문고 등의 현악기와 단소, 대금 등 관악기가 주축을 이루는 곡은 황이 내림마 음에 가까운 향악이다. 그와 달리 당피리, 편경, 편종 등이 편성되는 음악은 황이 다 음에 가까운 당악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음높이가 차이나는 것은 순수한 우리나라의 음악과 중국 음악의 차이에서 나온 특징이다. 음높이를 정하는 삼분손익법의 원리가 우리나라와 중국 음악에 공통으로 적용돼 사용하는 음들의 간격은 같지만 기본음의 음높이가 다른 것이다. 나아가 일본도 마찬가지로 삼분손익법을 적용하지만 음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일본 전통 음악의 특성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익숙한 서양의 12음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도, 도샵, 레, 레샵…’의 12개 음, 우리나라의 12율을 언뜻 들으면 두 경우 모두 12개의 음이 있기에 일치할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면 12율은 1/3을 빼고 더해가는 순정률(음 사이의 유리수 비율)의 규칙으로 이뤄진 데 반해 서양의 12음은 한 옥타브를 균일하게 12등분한 평균율을 이용해 음을 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환희<국립국악원 악기연구소> 연구원은 “서양의 음들은 100센트(음정의 단위)씩 간격을 두는데 율의 간격은 113센트인 경우도 있고 90센트인 경우도 있다”며 “12율은 각 음 하나하나를 정하는 데는 규칙이 있지만 전체를 봤을 때 서양의 음과 달리 음들의 간격이 균일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서양의 12음과 우리나라의 12율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12율은 우리나라의 음계이기는 하지만 모든 국악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궁중음악과 같은 정악은 악보에 기록돼 12율이 쓰였지만 민요나 판소리는 그렇지 않다. 민요나 판소리는 △특정한 절차 없이 구전된 점 △부르는 사람에 따라 음정이 다른 점 △독특한 창법들을 기록하기 어려운 점 등으로 12율이 적용되지 않았다. 정 연구원은 “교과서에서 민요가 정간보나 오선에 기록된 것은 교육적 목적으로 표기한 것일 뿐”이라 말했다.

미국의 현대 음악 작곡가 루 해리슨은 국악을 공부하려고 한국에 온 적이 있다. 그는 국악을 오선에 옮겨 배우지 않고 정간보와 12율을 익혀 배웠다고 한다. 그만큼 12율은 서양의 규칙적인 음과는 달리 조금씩 차이가 나는 음과 음 사이에 우리나라 전통의 맛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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