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변모된 ‘바른 소리’, 정가
끊임없이 변모된 ‘바른 소리’, 정가
  • 김유진 기자
  • 승인 2012.09.23
  • 호수 13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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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층 음악 정악에서 정가로 확립되기까지
▲ 국악의 정가는 정악의 한 갈래다.
정가(正歌)는 언뜻 ‘바른 소리(노래)’라는 뜻 이상을 유추해내기 어렵다. 정가의 개념은 국악에서 정악으로, 정악에서 정가로 다시 분류되는 과정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정가는 정악 중에서도 성악곡을 뜻하며 대표적으로 가곡, 가사, 시조가 있다.

정악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이왕직’을 만들었다. 이왕직은 남겨진 우리 왕족을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해 이씨 왕조(대한제국 황실을 낮춰 부르는 말)와 관련한 사무를 담당했다. 일본의 행정기관인 궁내성은 이왕직을 관할하면서 대한제국 황실의 일을 통제했다. 이런 일제의 탄압 속에도 이왕직은 정기적으로 조선의 궁정의식을 진행했다. 이때 쓰일 ‘악(樂)’을 연주하기 위해 ‘이왕직 아악부’가 조직됐다.

국악은 이왕직 아악부를 통해 보존되는 듯 했으나 궁정음악이 아닌 국악들은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왕직 아악부는 종묘제례악이나 문묘제례악과 같은 궁정음악 외의 음악은 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재현<정가악회 콘서트마스터> 씨는 “민속 악사들은 사라져가는 국악을 되살리기 위해 민간기구인 ‘조양구락부’를 만들었다”며 “조양구락부는 조상들이 국악을 지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음악 교육기관이다”라고 설명했다.

정악이라는 용어는 조양구락부가 상류층과 하류층의 음악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조양구락부에 소속된 조직원들은 대부분 조선 장악원 출신의 식자층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포함한 상류층이 즐기던 음악을 고상하며 바른 음악이라는 뜻으로 ‘정악’이라 칭했다. 그리고 일반 서민들이 즐기는 음악은 ‘속악(俗樂)’으로 낮춰 불렀다.

1970년대 중반 김기수<국립국악원> 원장은 정악 중에서도 성악곡들을 특별히 정가로 분류한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악(樂)’을 노래, 춤, 악기 연주가 함께 어우러진 음악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서양의 음악 사상이 도입되면서 우리 음악도 노래는 가(歌), 춤은 무(舞), 악기 연주는 악(樂)으로 나뉜다. 천 씨는 “김 원장은 정악 중에도 성악곡은 가(歌)자를 붙여 정가(正歌)로 부를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라며 “정가라는 말이 전면적으로 나타난 것은 1970년대 말 ‘월하정가선’이 발표된 때부터이다”라고 말했다. 김기수가 중요무형문화재 여창가곡 보유자 월하 김덕순이 부른 노래를 모은 악보집을 ‘월하정가선’이라고 하면서 정가라는 말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등장한 것이다.

이처럼 정가는 계승되지 못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서양 음악의 유입으로 정악 중에서도 성악곡으로 따로 분류되는 과정을 거치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야 마침내 개념이 확립됐다. 천 씨는 “정가는 상류층이 즐긴 음악이라 과거 서민들의 정서를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비판도 있다”며 “그러나 타악기로 연주해 흥을 돋우는 서민들의 음악과 달리 현악 연주로 고풍스럽고 청아한 느낌을 주는 것이 정가의 고유한 매력”이라고 말했다.

참고: 도서 「가사(제 41호)」, 「가곡의 새김」
논문 「가무악(歌舞樂) 통합 학습 모형의
개발 및 적용에 관한 연구」
▲ 시조「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에 국악 관현악 반주를 더한 남창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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