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설과 예술 사이에서 사회적 관습에 도전하다
외설과 예술 사이에서 사회적 관습에 도전하다
  • 이다원 기자
  • 승인 2012.09.22
  • 호수 137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그림 속 여인을 보라. 노골적인 자세와 대담한 눈빛.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이 여인에게서 수줍음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다.

미술사에서는 이 작품에 대해 “「올랭피아」만큼 사람들의 비웃음과 야유를 산 작품은 없었다”라고 말한다. 당시 실제로 그림을 본 관객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신문과 잡지에서는 연일 혹평을 쏟아냈다. 전시장은 분노에 찬 프랑스 국민들로 가득 차 작품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프랑스 국민들이 「올랭피아」에 극렬한 분노를 느꼈던 이유는 그림 속 여인이 매춘부 여성을 상기시키기 때문이었다. 목에 두른 검은 리본과 화려한 팔찌는 주인에게 팔려가기를 갈망하는 여자 노예를 상징한다. 흑인 하녀는 그림 속 여인의 하얀 피부를 강조해 그녀의 나체를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흑인 하녀의 오른편에는 등을 세운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바짝 치켜들고 있다. 강아지가 전통적으로 순종과 충실함의 상징이라면 고양이는 성적 문란의 상징이다. 특히 꼬리를 치켜세운 고양이는 남성의 성기를 떠올리게 해 더욱 외설적으로 여겨졌다. 결정적으로 ‘올랭피아’라는 이름은 문학에서 매춘부 여성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자주 사용되던 것이었다.

「올랭피아」가 그려진 19세기 초 프랑스 사회상을 알면 그림을 이해하기가 더욱 쉬워진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혼란과 충격에 가득 차있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황폐화된 도시를 대상으로 개발 사업에 착수했다. 도시 개발에 따라 시골에서 도시로 인구가 대거 유입되고 술집과 유흥가들이 자연스레 늘어났다. 파리의 밤은 고향을 떠나 쾌락을 좇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으로 가득 찼다. 노동자, 부르주아 할 것 없이 사창가를 드나드는 것이 프랑스 파리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기시 됐다. 당시 프랑스 예술계에서 허용된 누드화 속 여성은 비너스와 같이 이상적인 존재로서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현실 속 여성들의 나체는 ‘옳지 못한 것’이고 신화 속 여신의 비인격적인 누드만이 ‘옳은 것’이었다.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사회적 관습에 대한 이런 마네의 도전이었다. 마네는 자신의 작품「올랭피아」를 미술평론가 아스트뤽의 시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꿈꾸는 것이 두려워 올랭피아가 깨어날 때 사랑의 밤을 좋아하는 노예가 들어와 꽃으로 아름다운 날을 준비하고 고귀한 젊은 여인 안에서는 언제나 불꽃이 타오르네.” 매춘부로 여겨졌던 그림 속 여인을 마네는 고귀한 여성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정순<생활대 의류학과> 교수는 “마네는「올랭피아」에서 고상하고 아름다운 상상의 여인 비너스가 아닌 조금도 미화되지 않은 현실의 여인을 그렸다”며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려야 한다는 본인의 고집으로 대중의 조롱을 받아야 했지만 인상주의자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준 작가”라고 말했다.

한편 그림의 모델로 알려진 ‘빅토리아 뫼랑’은 실제로 매춘부가 아니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생라자르역」 등 마네의 다른 작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녀는 모델이자 화가였다. 매춘부라는 손가락질을 받아가면서 그녀가 마네의 모델 일을 계속했던 것은 화가로서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네의 「올랭피아」속에는 여성의 사회 활동이 제약적이었던 시절을 견뎌낸 한 여류화가의 슬픈 일생도 담겨 있다.

참고: 도서 「세계명화 비밀」,
프로그램 「명작 스캔들」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