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비극 속 두 여인의 전쟁
조국의 비극 속 두 여인의 전쟁
  • 노영욱 기자
  • 승인 2012.09.15
  • 호수 13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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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스페인이 낳고 프랑스가 키운 화가, 파블로 피카소. 그는 다각적인 시점에서 색과 면을 분해하는 ‘입체파’ 화가로 다양한 스타일과 여러 시대의 양식을 차용해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정순<생활대 의류학과> 교수는 “특이하게 피카소 스스로는 입체파의 이론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며 “이론은 미술 평론가의 몫으로 남기고 자신은 여러 방법으로 작품을 창조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그만의 독특한 입체파 양식으로 탄생된 작품이다. 삼각형을 이루는 구도 아래 다양한 소재들이 다각도로 표현돼 피카소의 표현양식을 집대성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그림을 보면, 삼각형의 가운데엔 창에 찔려 상처를 입은 말, 왼쪽엔 땅위에 쓰러져 있는 전사의 펼쳐진 손과 동물의 주둥이와 꼬리, 오른쪽엔 얼이 빠진 채 자신의 몸을 이끌고 가는 여인이 배치돼 있다. 또 그림의 양끝에는 각각 죽은 아이를 부여잡은 여인과 두 손을 들고 절규하는 여인이 묘사돼 있다. 「게르니카」는 이렇게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는 피카소가 ‘게르니카 공습’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그렸기 때문이다.

게르니카 공습은 1937년 4월 26일에 스페인 파시스트 반란군이 독일의 지원을 받아 게르니카 마을을 공습한 사건이다. 당시 스페인은 내전에 휩싸여 있었다. 프랑코의 반란군은 극우주의자와의 연대를 과시하고자 했던 히틀러와 손을 잡고 공화주의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게르니카 일대를 폭격했다. 

공습 소식을 접한 뒤 분노한 피카소는 이를 세계에 고발하고자 「게르니카」를 그렸다. 특히 피카소는 그의 작품이 전쟁을 기록하는 데에 그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에 사실적 묘사에 치중했던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과격한 해체를 통해 비극의 본질과 인간이 겪는 고통을 전달하고자 했다. 이 교수는 “거의 무채색으로 처리된 기법을 통해 우리는 무모한 전쟁으로 희생된 인간의 처절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며 “흑백이 지닌 강렬함은 정서적으로 더 강한 인상을 남긴다”고 전했다.

그런데 피카소는 이 작품에 자신의 은밀한 사생활 또한 반영했다. 당시 그는 예술적 영감을 주는 매개체로 여자를 이용했고 수많은 여성들과의 염문설로 화제가 되곤 했다. 「게르니카」를 그릴 때만 해도 그는 올가 코클로바와 이혼하고 도라 마르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다. 동시에 비밀관계를 맺어오던 마리 테레즈는 그의 딸 마야를 출산했다. 사진 작가였던 마르는 피카소를 위해 작업실을 마련해주고 모든 작업과정을 사진으로 남긴 만큼 피카소에 대한 사랑이 컸다. 하지만 테레즈가 그 작업실에 종종 찾아오면서 두 여인 사이에서 피카소를 둘러싼 사랑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피카소는 테레즈를 죽은 아이를 부여잡은 여인으로, 마르를 두 손을 들고 절규하는 여인으로 표현해 이 두 여인을 「게르니카」에 반영했다. 

「게르니카」는 전쟁의 잔학성과 인간의 선악에 대한 진리를 예술의 형태로 표현해 20세기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 안에 정의를 담길 원했던 피카소의 의도대로 이 작품은 현재까지 반전(反戰)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를 사랑한 두 여인을 발견해 새로운 차원으로 감상자에게 다가올 때 「게르니카」의 매력은 배가 된다.

참고: 논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작품에 관한 연구」, 도서 「지식의 미술관」,
프로그램 「명작 스캔들」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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