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내려놓고, 그는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식물 이야기를 들려줬다
모자를 내려놓고, 그는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식물 이야기를 들려줬다
  • 김건식 기자
  • 승인 2012.09.02
  • 호수 13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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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대의 녹색 생태지기, 이택주<한택식물원> 원장

최근 몇 년간 건강과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웰빙 음식을 찾거나 친환경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친환경에 대한 관심은 의류, 건축, 조경 등 다양한 분야까지 확대됐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야생화를 비롯한 여러 식물은 생소한 편이다. 이런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한 사람이 있었다. ‘모든 자연활동의 근본은 식물’이라며 식물의 중요성을 외치는 사람, 바로 이택주 원장이다.

이택주 원장의 원동력은 ‘집념’이다

인생을 건 식물원
이택주 원장을 만나러 용인에 위치한 한택식물원에 도착했다. 식물원에 도착하니 코끝에 거름 냄새가 밀려왔다.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유리온실 식물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거의 하나의 야산에 가까웠다. “응, 왔어? 어서 와.” 편안한 인상의 그는 작업복을 입은 채 식물원 안 침상원 단풍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9천여 종의 식물과 35개의 주제원을 갖춘 우리나라 최대의 식물원인 한택식물원을 설립했다. 식물에 대한 집념 하나로 식물 분야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식물원을 세워낸 것이다. 지금은 누구보다도 식물을 아끼는 그이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원래 식물 쪽에 관심이 없었어. 1960년대에 젊은 사람들 꿈이 뭐였는 지 알아? 낙농업을 하는거였어. 그거 하겠다고 대학 졸업 후 고향에 내려와 젖소도 사고 한우도 샀는데 한우파동이 났지 뭐야.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면 망했겠지. 그래서 낙농업을 접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는데 나무가 자꾸 죽어. 전문가를 찾아가서 물어보고 다시 심었더니 더 잘 죽어. 이건 안 되겠다 싶었지.”

그가 처음 식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당시, 우리나라는 기초과학 중 특히 식물분야에 거의 투자를 하지 않았고 식물에 관한 정보가 전무했다. 모양새를 갖춘 식물원이 없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식물원 문화가 이미 발달한 다른 나라를 보며 식물에 무관심한 우리나라 현실에 그는 안타까웠다.

“자연의 섭리라는게 있어. 그게 바로 식물로부터 시작되는 거야. 미생물이 있는 땅에서 식물들이 유기물을 떨어트려주니까 거기에 식물들이 나고 그걸 동물들이 먹는 거지. 식물을 안 먹고 사는 동물 있어? 없지. 우리가 먹는 소, 돼지 등도 식물을 먹고 살잖아. 식물들이 있어야 먹이사슬이 끊이지 않고 개체 종류도 다양해지는 거지. 산소는 누가 공급해. 이렇듯 식물은 일차적인 것이고 끊임없이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 다른 선진국에서는 이를 알고 식물원을 건립해서 식물들을 가꾸는데 우리나라는 심지어 식물을 키우는 산업인 농업조차 외면하고 있으니, 참.”

그는 우리나라에도 제대로 된 식물원이 있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식물원 설립을 결심한다.

“우선 우리나라 식물을 어떻게든 구한 후에 다른 식물들을 들여와야겠지? 근데 전문가나 식물에 대한 마땅한 정보가 없으니 직접 발로 뛰어다녔지. 전국 곳곳에 안 다녀본 곳이 없어. 특정 장소가 아니면 나지 않는 식물들이 많거든. 북한에 있는 식물을 구하려고 중국의 여러 오지까지 돌아다니면서 식물을 채집하고 혼자서 공부했지.”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신경쓰지 않고 담담히 대화를 이어나갔다. 무성한 단풍나무 잎이 거친 빗줄기를 막아 줬다. 마치 단풍나무가 커다란 우산이 돼준 것 같았다. 나무는 이런 식으로도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소나기에도 인터뷰는 계속 진행됐다.

우리가 식물원의 이미지로 떠올리는 것은 관엽식물과 선인장이 있는 유리온실 혹은 예쁜 꽃들이 피어있는 정원이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식물원의 조건은 다르다.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려서 식물원을 열어낸 그는 어떤 식물원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식물원이 해야 하는 일은 크게 네가지가 있어. 첫 번째로 종자 확보야. 석유가 없어도 조금 불편하겠지만 사람들은 살 수 있어. 그런데 식물이 없어서 먹을 게 없으면 사람은 죽어. 또 의약품은 어디서 나지? 다 식물이잖아. 다양한 종을 확보해서 많이 가지고 있는 게 식물원의 가장 큰 임무 중 하나야. 두 번째로는 여러 식물을 소개하는 거야. 많은 식물들을 나 혼자 가지고 있으면 뭐하나. 잘 관리해서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줘야지. 그래서 식물원 또한 비영리재단으로 운영 중인 거고. 또 식물에 관한 연구가 세 번째야. 있는 식물을 잘 번식시키고 연구를 통해 좋은 품종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마지막은 교육이야.”

그를 일으켜준 것
지난 2003년 개원 이래 매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는 한택식물원은 세계적인 식물원으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큰 규모의 식물원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이 있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는 엄청 힘들었어. 수백억의 돈을 쏟아 부었는데 나아갈 길이 보이질 않았으니.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포기하려 했지. 근데 이제껏 열심히 해오다가 그만두려고 하니 참 심란했지. 잠도 안 오고. 정말 힘들었는데 언론과 학계에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보고 최고라고 해주는거야. 당시 생물 종 다양성 협약이 이뤄진 후 야생화에 대한 관심이 늘고나서 전국의 언론이 식물에 관한 쪽을 취재하기 시작했어. ‘용인의 한택식물원에 가면 다 있더라’해서 언론에서도 오고 이 분야의 유명한 교수들도 찾아와서 나보고 대단하다고 했지. 사람들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치켜세워 주는데 포기할 수 없었어.”

당시 상황이 그는 식물원을 여태껏 이끌고 올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고 했다. 운명같다고도 했다. 수십년간 공을 들여온 식물원 설립을 포기할 뻔 했는데 사람들의 응원이 그를 막아준 것이다. 사람들의 응원이 없었으면 지금의 한택식물원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돈은 못 번다는 거지. 돈하고는 거리가 멀어. 하하. 그런데 돈만 벌고 늙어서 가버리면 뭐하나. 뭐든 하나 남기고 가는게 좋잖아. 우리나라에 없는 것, 우리가 안했는데 꼭 해야하는 것을 내가 꼭 해보고 싶었어.”

사진 류민하 기자 rmh719@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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