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은 때때로 불편하다
‘열정’은 때때로 불편하다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2.09.02
  • 호수 13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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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열하게 달렸던 대학 사회가 2달여간의 휴가를 맞이한 시간 동안에도 ‘여느 때처럼’ 크고 작은 이슈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수많은 이슈 중에서도 올림픽은 단연 손꼽힐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꽤 재밌는 올림픽이었다. 전통적으로 두각을 드러냈던 양궁, 유도, 태권도 등에서의 활약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여기에 축구, 체조, 펜싱 등에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의 성과까지 더해지며 한밤과 새벽으로 이어진 국민들의 ‘열정’은 더욱 강렬해졌다. 한대신문의 입장에서는 올해 신년호로 발간한 지난 1358호에서 인터뷰 기사를 실었던 양학선 선수가 영광의 주인공 중 한명이 되어 기쁨이 더했다.

그러나 동시에 참 불편했던 올림픽이었다. 배드민턴 경기에서의 져주기 논란, 각종 판정 논란 등으로 인해 강한 불만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후반부에는 축구 경기에서의 ‘독도 피켓 세레머니’로 인해 한 선수가 고초를 겪으며 이런 분위기는 더 격해졌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참 많은 마음고생을 해야만 했다. 국민들의 ‘열정’은 선수들에게 필요 이상의 부담을 줬다. 결승에서 져서 딴 은메달이 3·4위전에서 이겨서 딴 동메달보다 기쁘지 않다는 농담은 한국선수들에게 유독 절실하게 와 닿는 말인 듯하다. 또 여느 큰 국제 행사를 겪을 때마다 으레 나오는 말이 됐지만, 대한민국 사회 내에서 여러 중요한 사건들은 이 때문에 반강제로 묻혀야만 했다.

그러나 내게 개인적으로 가장 절망적이었던 점은 이 ‘열정’에서 비롯된 지나친 ‘분노’였다. 이 열정은 사람들이 하나의 주제, 즉 올림픽에 열중해 최선을 다해 이를 지지하는 데에는 훌륭한 역할을 했으나 이 주제로부터 벗어나는 데에는 큰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자면 간혹 “승리에 대한 선수 개인의 효용이야 당연하다 쳐도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큰 효용이 있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이기면 기쁘고 지면 기분이 나쁜 것이야 당연하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열정’의 정도는 때때로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며, 아니 사실은 그 광경 속에 완전히 속해있으며 나는 생각했다. “팍팍한 삶이 이들을 ‘동일시’의 쾌락에 빠뜨렸다”고. 금메달을 딴 선수들의 이름은 국기와 함께, ‘대한민국’이란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과 함께 솟아올랐다. 선수 개인의 이름과 대한민국이란 두 가지 정체성이 고양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아를 투영하는 곳은 대개 선수 개인의 이름보다는 대한민국이리라.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종합 순위 몇 위를 차지하는 것, 이 사실이 그들 개인의 정체성을 잠식하게 되는 것이다. 삶이 지금보다 더 살기 좋고, 사회가 지금보다 더 부드럽고 편안했다면 이들의 쾌락은 평소 개인적 측면에서 얻는 것에서 충분했을 것이다. 올림픽에서 얻는 국가 정체성에서의 기쁨은 그저 덤이었을 것이다. 고로 이것에 자신의 자아를 투영, 아니 온통 쏟아 부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결국 그 누가 이런 사람들을 탓할 수 있으랴. “모든 문제의 근원이 사회에 있다”란 진부하고 억지스러운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불편한 열정을 직접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개인이지만 그 열정의 실마리를 잡고 있는 것이 개인을 둘러싼 불편한 사회란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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