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스러운 유죄 판결
억지스러운 유죄 판결
  • 이나영 기자
  • 승인 2012.04.08
  • 호수 136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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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3년 4월 12일, 갈릴레오에 대한 종교재판 시작

▲ Joseph Nicolas Robert-Fleury의 「종교재판을 받는 갈릴레오」, 1847년
나는 지금 심문관으로서 갈릴레오를 심문하는 중이다. “지구는 돌고 있다”며 성경에 어긋나는 주장을 고집하던 그를 판결하게 된 것이다. 그를 유죄로 판결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마땅한 근거가 없어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미 약 20년 전쯤 종교 재판소에 온 적이 있던 그였다. 하지만 처벌이 약해서였을까. 갈릴레오를 반대하던 제수이트 교단이 그를 다시 재판소에 올렸다.

지원을 아끼지 않던 독일의 케시 왕자가 죽은 후 갈릴레오가 속해 있던 ‘린케 학회’는 구심점을 잃었다. 제수이트 교단 사람들은 지금만이 갈릴레오를 공격할 수 있는 때라 생각했던 것 같다.

갈릴레오가 재판소에 오게 된 데는 교황의 영향도 컸다. 무척 뜻밖이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갈릴레오를 아끼던 분이셨다. 심지어 갈릴레오가 지동설과 천동설을 비교하는 내용의 책을 써도 좋다고 허락까지 하셨다.

그랬던 교황께서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소로 소환하시다니. 아마 교황께선 갈릴레오의 책 「대화」 중에 당신을 조롱한 내용이 있다는 이간질을 믿으셨던 것 같다. 이에 교황께선 「대화」를 금서로 지정해야 할지를 판단하라는 명령을 하신 것이다.

나는 갈릴레오에게 물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어떤 방법으로든 변호하거나 가르치지 말라는 명령을 기억하느냐.” 명령을 거부했다는 것을 문제 삼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는 1616년 작성된 보증서에 그런 말이 없다고 주장했고 이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갈릴레오는 명령을 받지 못한 것이었다. 당시 갈릴레오와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만남을 기록했다는 문서엔 그가 명령을 받았다고 기재돼 있지만, 서명이 없어 그 서류가 사실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갈릴레오에게 유죄를 내리기엔 부족한 증거였다.

우리는 심히 갈등했다. 갈릴레오를 무죄로 판결해야하는 상황이지만 그럴 순 없었다. 무죄로 판결한다면 갈릴레오를 이단으로 고발한 사람이 벌을 받게 되는데 그를 고발한 사람들은 교회의 최고 권위자들이었다. 우리에겐 힘이 없었다.

마땅한 증거가 없었기에 우리는 갈릴레오를 계속 붙잡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감옥소가 아닌 우리가 있는 건물의 방을 내줘 편히 쉴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갈릴레오를 어떻게 하면 유죄로 판결내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양심에 찔렸지만 무죄로 판결이 난다고 해도 그에 대한 종교 재판은 반대세력에 의해 계속될 것 같았다.

결국 갈릴레오의 자백을 받아냈다. 그는 “내 실수는 헛된 야망과 무지, 그리고 부주의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교황께선 제수이트 교단의 압박에 갈릴레오가 유죄로 판결나길 바라셨기에 그의 자백을 듣고는 무척 기뻐하셨다.

그러나 아무리 유죄로 보려 해도 증거가 부족했다. 명령을 위배했다고 하지만 증거가 법률적 효력이 의심스러운 문서이기에 ‘반 정도만’ 유죄로 인정됐다. 또 금서 목록의 규정에 어긋나는 책을 출판했다고 하지만 로마 검열관이 책의 출판을 허락했기에 이 역시 ‘반 정도만’ 유죄다.

우리는 “두 가지 죄가 반씩 인정되므로 이를 합치면 하나의 유죄가 성립된다”고 어이없는 결론을 내렸다. 유죄 판결의 결과「대화」를 금서 목록에 올리고, 갈릴레오에게 2급 이단 혐의를 선고하기로 했다.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교황께서 이를 원하셨던 것을. 아, 세상은 역시 권력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던가.이나영 기자

참고: 저서 「물리학의 탄생과 갈릴레오」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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