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독단적 외눈으로 바라봐선 답이 없다
FTA, 독단적 외눈으로 바라봐선 답이 없다
  • 김명지 편집국장
  • 승인 2012.03.17
  • 호수 13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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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자는 최근 경제학 관련 수업을 통해 흥미로운 얘기들을 접한다. 경제학은 모든 사람들이 일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선택하길 희망한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가능할까.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항상 옳을까. 대답은 역시 “그렇지 않다”이다. 예시와 함께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훤과 양명이라는 두 청년이 있다. 둘에게 우연히 좋은 기회가 온다. 왕이 이들에게 100냥을 나눠가질 것을 제안한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훤이 먼저 100냥을 전부 가지고 이후 양명에게 얼마나 나눌지 제안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양명이 이를 거부해 거래가 성사되지 못하면 왕은 100냥을 도로 빼앗아 없던 일로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훤과 양명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무엇일까. 우선 훤이 100냥을 모두 자신이 갖고 양명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 것을 제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양명이 제안을 수락할 이유도, 거부할 이유도 딱히 없기 때문에 결과가 모호하다. 제안을 수락하든 거부하든 양명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훤은 자신이 95냥을 갖고 양명에게 5냥을 주는 절충안을 생각해낸다. 이 경우 양명은 이를 받아들일까.

천재적인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믿음처럼 어떤 개인이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양명은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나 제안을 받아들이면 5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양명은 훤에게 답한다. “싫다.”

“왜 그런 선택을 하셨나요. 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래도 5냥은 얻을 수 있었잖아요.” 기자의 질문에 양명이 답한다. “치사하게 자기 혼자 95냥을 갖고 저에겐 5냥만 주다니요. 그럴 바엔 둘 다 안 갖는 게 낫죠.”

미국에서 실제 유사한 실험을 실행한 결과 과반수의 사람들이 주어진 100달러를 50 러와 50달러로 나눠 가졌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물론 훤과 양명의 사례는 이를 최대한 축약하고 단순화한 것으로 실제로는 훨씬 복잡한 과정과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이처럼 삶 속에서 종종 ‘경제적 합리성’과는 먼 선택을 한다. 글을 읽고 있는 독자 본인이었다면 어땠을까. 1만원이 주어졌을 때 9천 500원을 본인이 갖고 500원을 친구에게 주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 각각 5천 원 또는 그와 비슷한 범위 내에서 결정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이것이 그르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이에 대한 원리를 ‘공리주의’, 특히 존 스튜어트 밀의 ‘질적 공리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공리주의는 ‘사회구성원의 최대다수 최대행복’을 원칙으로 하는데 밀의 경우엔 특히 행복의 양, 수치적 측면뿐만 아니라 질적 측면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훤이 양적으로 많은 돈을 얻더라도 양명에게 적은 돈을 전해 욕을 먹고 관계가 서먹해진다면, 또 나아가 이것이 전 사회적인 현상으로 확대된다면, 그 사회의 질적 공리는 성장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천재학자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의 효율적인 움직임에 따라 사회가 완벽히 운영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이것이 현대에 이르러 어긋난 이유다.

얼마 전 경제학 관련 수업을 들으며 FTA 체결에 대한 반대 조류 자체에 불만을 표하던 교수의 말에 회의를 느꼈다. FTA로 비교우위를 가진 품목을 통해 자유무역을 한다는 점에서 경제를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평가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 합리성은 과정에서의 의미지 결코 결과에서의 의미가 아니다. 합리적인 ‘고려’가 최선의 ‘결과’를 낳는 것만은 아니란 뜻이다. FTA 역시 이 같은 ‘합리적’ 계산이 사회의 질적 공리와 충돌하는 것이다.

FTA를 외눈, 즉 한 학문의 측면에서 일방적으로 평가해선 안 된다. 이것은 경제 그 이상, 어쩌면 한국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협정이다. 때문에 나는 그런 독단적 사고에  거부감을 느끼며 때때로 두렵기까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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