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겋게 달궈진 쇠에 비전을 두들기다
벌겋게 달궈진 쇠에 비전을 두들기다
  • 김유진 기자
  • 승인 2012.02.24
  • 호수 1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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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대장장이 차인규 씨

호미를 만든다. 낫을 갈고 곡괭이를 손질한다. 과거 대장장이의 모습은 이러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런 대장장이를 찾지 않는다. 호미며 낫이 필요 없다. 이제는 사양길로 접어든 대장간을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곳으로 변화시킨 사람이 있다. 대장장이 차인규 씨는 대장간에서 쇠로 장식품과 철문 등을 만든다.

▲ 차인규 씨가 영화 「배트맨」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철제 대문 앞에 서있다. 문 뒤에는 그의 작품들을 모아둔 공간이 있다.
쇠 길을 걷다
양주 벌판에 자리 잡고 있는 그의 작업장의 역사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집안에서는 쇠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조선말 증조할아버지가 시작한 대장간이 4대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증조할아버지가 하시던 대장간을 할아버지, 작은아버지께서 이어오셨어요. 작은아버지 밑에서 자란 제가 그걸 이어받았죠. 100년이 넘게 가업을 지속했네요.”

어려운 시절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 전쟁을 겪으면서 먹고 사는 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그의 아버지는 6·25 전쟁 때 맞았던 총상의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그는 작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고 낮에는 기술을 배웠어요. 대학교 갈 생각은 못했어요. 한 번 공부 의욕이 떨어지기 시작하니까 엄청난 차이가 나더라고요. 그림에는 솜씨가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다른 건 부족해도 이쪽은 꼭 이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나름의 돌파구를 만들어가고 있었죠.”

그는 자신만의 소질을 찾았다. 그림 재주는 손재주로 이어졌다. 어린 소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택한 길은 끝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옛날에 국민교육헌장이라고 있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건데 달달 외워야 했죠. 근데 그 내용이 참 좋아요. 거기에 저마다 소질을 계발하란 말이 있어요. 지금도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는 공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그건 잘못된 거에요. 남들이 이 길로 간다고 해서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 길이라는 확신이 든 곳을 가야죠.”

배트맨이 구해준 가족
대장간 일은 농사 주기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자연스레 겨울이 되면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들었다. 불을 피우는 데 5천 원이 들었지만 1만 원어치 일도 들어오지 않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에게는 토끼 같은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다.

“물뿌리라는 게 있어요. 그걸 산에서 잘라 와서 불에 달구면 자유자재로 모양을 만들 수 있죠. 그걸 망치 자루로 만든 다음 50개씩 묶어서 의정부 공구상에 팔고 그랬어요. 겨울에는 그걸로 먹고 살았죠. 그래도 행복했어요. 한 번 나가면 4만 원 정도를 벌어올 수 있었는데 그 당시 삼겹살이 한 근에 3천 원이었거든요. 그걸로 가족들끼리 삼겹살도 오순도순 먹고. 그게 행복이죠 뭐.”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영화 ‘배트맨’을 보게 된다. 영화에서 철제 대문을 보고 그는 저런 걸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대장간이 새롭게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미군 부대를 다니면서 잡지를 구했어요. 그걸 뒤져보면서 쇠로 가구를 만들어 보곤 했죠. 그 당시 우리나라는 나무로만 가구를 만들었지 그런 게 없었거든요. 제가 그렇게 하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관심을 두더라고요. 서울대 근처에 처음 대학로가 생겼을 때 누가 부탁해서 만들었더니 인기를 끌기 시작했죠.”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던 대장간은 현대의 길을 걷기로 했다.

“공부를 많이 해야죠. 앞으로 제가 아니어도 누군가 쇠를 두드려 뭔가를 만들 수 있도록 말이에요. 일본의 장인 문화처럼 말이에요. 우리나라도 그런 문화가 형성됐으면 좋겠어요.”

▲ 차인규 씨가 달군 쇠를 망치로 두드려 모양을 내고 있다.
단조에 빠지다
그의 하루는 아침 7시 30분부터 시작된다. 의정부 집에서 출발해서 한 시간을 달려 양주 작업장에 도착한다. 기계에 불을 지피고 연기가 빠질 때까지 기다린다. 겨울에는 기계가 얼어 뜨거운 산소로 부드럽게 해줘야 한다. 작업 시작이다.

“주문이 들어오면 디자인을 먼저 결정해요. 손님이 원하는 디자인을 나한테 부탁하는 때도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은 제가 직접 그려요. 평소에 이것저것 많이 봐둬요. 쇠를 두드리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도 있어요. 그럼 하고 있던 작업이 끝나고 샘플을 만들어 봐요. 한 마디로 나한테 복이 온 거죠.”

그는 쇠를 두드려 작업하는 단조 방식만을 사용한다. 모든 작품은 그의 손을 거친다. 완벽히 똑같은 작품이 나오기 어렵고 대량생산도 불가능하다. 수입도 그리 좋지 않다. 그럼에도 수작업만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단조는 망치로 하나하나 쳐서 만들기 때문에 공이 많이 들어가요. 하지만 어떤 망치로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수백, 수천 가지의 방식이 나오죠. 이게 단조만의 매력이에요.”

작업장 한 켠에는 그의 작품들이 전시돼있다. 찬찬히 둘러보면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다.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 떼도, 늠름하게 서 있는 촛대들도 각자 개성을 뽐내고 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작품들이다.
 
이어지는 쇠붙이 소리
그는 우리나라 대장장이의 역사는 농기구에서 멈췄다고 말한다. 그는 멈춰진 역사를 쇠 공예로 다시 살리고 싶다고 했다.

“골동품처럼 대대손손 물려줄 만한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대문이었던 것이라도 나중에 떼서 부분이라도 집에 두고 싶은 그런 작품 말이에요. 손님들은 쇠문이 비싸 보여서 한다고 말하는데 전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 내내 그는 쇠로 할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대장장이는 쇠를 다루는 기술에 예술성과 창의성만 가미되면 할 일이 무척 많아진다는 것이다. 불혹이 넘은 나이지만 쇠를 두드리고 망치질하는 그의 손은 쉬는 법이 없다. 뜨거운 쇠만큼이나 뜨거운 열정이다.

“잘 사는 나라일수록 목수 일이 발달한다고 하더라고요. 자기 일이 끝나고 남는 시간에 직접 두드리면서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거든요. 그러면서 성취감도 느낄 수 있고 스트레스도 풀고.”

차 씨 가문의 가업은 그도 그랬듯 아들 동은 씨가 이어갈 예정이다. 동은 씨는 올해 회화과를 졸업하고 그에게 용접을 배우고 있다. 회화는 다른 어떤 미술 분야보다도 상상력을 많이 키울 수 있을 것 같아 그가 추천했다. 창의성이 뛰어나면 대장일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

동은 씨는 “대대로 내려오는 거라 가업을 잇기로 스스로 결정했다”며 “남자는 나 하나라 내가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많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 “서른이 되기 전에 유학을 가 체계적으로 대장간을 운영하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냈다.

그는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말 한마디마다 스스로 가업을 잇겠다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왔다.

“지금은 작업장이 전세에요. 하지만 내 아들은 내 땅, 내 건물에서 편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요. 아들 작품으로 전시회도 열었으면 좋겠어요.”         
                     
사진 류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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