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뛰어 세계를 넘는 사나이
한국을 뛰어 세계를 넘는 사나이
  • 김유진 기자
  • 승인 2011.12.30
  • 호수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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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만의 금빛을 꿈꾸는 체조선수 양학선<한국체육대 체육학과 11>

4개월. 양학선 선수를 만나는데 4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조성동<체조남자대표팀> 총감독이 내년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혹여 그의 마음이 흐트러질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체조계에 첫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줄 선수로 각광받고 있다. 이미 세계기계체조선수권대회(이하 세계대회)에서 1천 80도를 돈 뒤 도마 반대 방향으로 서는 신기술을 선보이며 올림픽 티켓을 거머쥐었다. 세계대회에서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은 양학선이 다섯 번째다.

새 역사를 쓰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고난도 기술 ‘여2’를 훌륭히 소화해냈다. 여홍철<경희대 체육학과> 교수가 지난 1994년 개발한 ‘여2’는 공중에서 앞으로 돈 뒤 몸을 두 바퀴 반 비트는 난도 7.0의 기술이다. 세계무대에서 이 기술을 성공시킬 수 있는 선수는 10명 안팎이다. 그는 이 기술을 한 단계 발전시켜 반 바퀴를 더 회전하는 신기술을 탄생시켰다.

“신기술은 작년 세계대회 전부터 연습했어요. 하지만 그 때 4위를 하고 나서 기존 여2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매일 연습했어요. 안될 때도 많고 잘될 때도 많고 반반이었어요. 시합 전날까지 착지가 될 듯한데 계속 안 되는 거에요. 시합 당일 한 키로 됐죠.”

이 기술은 양학선 선수의 이름을 따 ‘양1’으로 등재될 예정이다. 여 교수에 이어 한국 선수로는 두 번째로 자신의 이름을 딴 기술을 올리게 된다. 국제체조연맹은 이 기술의 난도를 역대 최고인 7.4점으로 인정했다.

그는 2011 코리아컵 고양국제체조대회와 세계대회에서 이 기술로 우승을 차지했다. 세계대회에서는 16.866점이라는 개인 최고 점수일 뿐만 아니라 체조 전 종목 역대 최고인 점수를 받았다. 2위를 한 선수와 무려 0.2점 차이였다. 보통 0.001점 차로 메달이 갈리는 도마의 특성상 매우 여유 있는 우승이었다.

“도마는 1차, 2차 시기로 나눠 2번을 뛰어요. 근데 그 2번을 뛴 합계점수가 0.2점 차이가 났다는 건 어마어마한 거에요. 제가 2차 시기에 스카라 트리플(공중에서 옆으로 돈 뒤 몸을 세바퀴 비트는 기술)을 하고 나서 옆으로 한 발 움직이고 라인까지 나갔어요. 그런데도 0.2점 차이가 났다는 건 거기서 두 발을 더 걸어도 된다는 얘기에요.”

도마는 착지가 중요한 종목이다. 그런데 착지 후 두 발을 더 걸어도 된다고 하니 그의 신기술이 놀라울 뿐이다.

그는 이 기술로 런던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한다. 우리나라 체조는 1960년 로마 올림픽부터 출전해왔지만 50년이 넘도록 아직 금메달을 따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신기술을 선보이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그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 유독 큰 무대에서도 대담하다. ‘한국 체조의 떠오르는 태양’, ‘50여 년 한국체조의 한을 풀어줄 선수’,‘김연아, 박태환에 이은 비인기 종목 스타 탄생’이라는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니는 이유다. 메달 색에 대한 기대가 부담되지는 않을까.

“기회라고 생각해요. 저한테 한국 체조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기회가 온 거 잖아요. 그냥 금메달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에 따게 된다면 영광이죠. 부담감은 없어요. 어차피 부담을 가져도 똑같이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오히려 주변 기대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일까. 세계대회 한 달 전에 다친 오른쪽 발목 때문에 두껍게 테이핑을 하고 경기에 나가야 했지만 이상하게 도마 앞에 서니 통증이 까맣게 잊혀졌다.

“아직도 조금 아프긴 하지만 훈련할 때 큰 지장은 없어요. 그런데 세계대회 뒤 열린 스위스 초청경기에서 왼쪽 발목을 다쳤어요. 지금 손목도 좋지 않은데 차라리 지금 다치고 올림픽 때 다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아요.”

▲ <그의 손에는 연습의 흔적이 가득하다>

 
우연이 만들어낸 필연

20살의 어린 나이에 ‘도마의 신’이라 불리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그지만 우연한 계기로 체조를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 운동을 하던 형을 따라 갔다가 체조를 접하게 됐다.

“형은 지금 군인 하사에요. 체조와는 거리가 멀어요. 처음에는 심심해서 시작했어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형이랑 둘이 집에 있었거든요. 형이 운동하러 가면 혼자 있게 되잖아요. 형을 따라 다니는 게 낫겠다 싶어서 엄마한테 말씀드렸어요. 엄마도 허락해주셨고요.”

원래 순발력이 좋았던 그는 곧 두각을 나타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전국소년체전 이단 평행봉 동메달을, 6학년 때는 링 금메달을 따내며 체조계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하지만 운동선수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슬럼프를 그도 비켜가지는 못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슬럼프가 찾아왔다. 체조를 하면 성장이 더디게 된다. 키도 크고 싶고 연습 대신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에 방황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한두 달 연습을 쉬기도 했다.

“다른 운동 같은 경우는 보강훈련, 웨이트만 많이 하면 되잖아요. 근데 체조는 감이 중요하기 때문에 조금만 연습을 안 해도 힘들어요. 몸을 다시 잡아야 하니까요. 체조선수가 그 정도 쉬었다는 건 정말 오래 쉰 거라고 보면 돼요.”

그 무렵 부모님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때 ‘지금 뭐하는 짓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다잡았다.

“엄마랑 보살님 집에 갔어요. 엄마가 예전에 가봤던 곳인데 용하다고 해서 가봤거든요. 그때 그 보살님이 저한테 ‘넌 내년에 국가대표가 된다’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어머니랑 약속했죠. 국가대표가 안되면 운동 안하겠다고.”

신기하게도 그는 정말로 다음 해에 국가대표가 됐다. 혹독한 슬럼프를 겪은 뒤에 값진 선물을 받은 것이다. 또래 중에 혼자였다. 광주체육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운동선수의 길만 걸어왔지만 처음 태릉 선수촌에 들어왔을 때는 감회가 새로웠다.

“새로운 선생님께 새로운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신났어요. 국가대표라는 생각에 긴장은 하지 않았어요.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목표는 금메달이었거든요. 앞으로 제가 참가할 수 있는 3번의 올림픽에 모두 참가해서 금메달을 따고 싶어요.”

자신감이 넘친다. 당당하다. 그는 모든 일에 긍정적인 편이다. 25m 도움닫기를 한 뒤 5초 안에 승부가 결정 나는 도마에 딱 어울린다. 우연히 시작한 체조지만 그는 타고난 체조선수다.

하지만 체조엔 비인기 종목이라는 그림자가 따라 다닌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한 이후 광고 제의가 몇 개 들어왔다. 그는 그 그림자를 없애기 위해 몇몇 광고를 찍으려고 했지만 마음이 흐트러질까봐 주변에서 반대했다. 모든 광고 활동은 런던 올림픽 이후로 미뤘다.

“전 하고 싶죠. 리듬체조도 비인기 종목인데 손연재 선수가 광고 찍고 방송에 출연하면서 많이 알려졌잖아요. 저도 제 종목을 알리고 싶어요. 보통 기계체조라고 하면 기예나 곡예쯤으로 생각하는데 기계체조도 생활스포츠로 거듭났으면 좋겠어요.” 

사진 류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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