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 이나영 기자
  • 승인 2011.11.19
  • 호수 13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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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년 11월 21일, 대륙봉쇄령을 내린 나폴레옹 1세
▲ <루브르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1807년>
나는 늘 정복을 지향해왔다. 정복이 나의 명예를 만들었고 정복만이 명예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다. 내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전쟁과 그 전쟁에서 이룬 승리가 필요했다.
영국은 이런 내게 큰 장애물이었다. 영국이 건재하는 한 나의 대륙 지배는 언제 좌절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영국을 대륙봉쇄령 등으로 견제하게 된 이유였다. 왜 이런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인지 돌아보고자 한다.

나는 1798년에 영국 원정군 사령관으로서 영불해협에 시찰을 간 적이 있었다. 이 때 나는 프랑스가 여태 영국에 패했던 것이 육군력에 비해 부족했던 해군력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그들의 해군력이 워낙 막강해 장기간의 준비 없이 정벌하기란 불가능한 듯 보였을 정도다.

영국이 1793년에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해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한 이후 영국과 우리는 줄곧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1802년에 영국은 국내의 종교 문제로 정치적 변화를 겪었고 나 역시 황제 즉위를 준비하기 위해 평화를 원했던 터라 영국과 평화를 약속하기로 했다. 그 결과 체결된 것이 ‘아미앵 평화조약’이었다. 내겐 이 평화가 새로운 전쟁 준비를 위해 국내 문제를 정리하고 해결하는 시간이 됐다. 특히 영국의 해군력과 무역 영향력을 약화시키는데 주력했다. 동시에 영국에게서 상업적 우월권을 빼앗아 오려 애썼다. 영국의 번영은 해외 식민지에 의존한 상태였다. 때문에 영국과 식민지의 무역에 타격을 가하기만 하면 쉽게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듯 했다.

그동안의 정복 활동을 통해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모든 나라가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나는 본격적으로 영국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스위스와 같은 위성국가들과 식민지에 대해서도 영국 제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사실 영국이 평화가 전쟁보다 비싼 대가를 요구함을 깨닫게 해 스스로 아미앵 조약을 철회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미앵 평화 조약으로 유럽 대륙과의 무역도 회복되리라 믿었던 영국 상인들은 크게 실망했다. 결국 영국은 내 계획대로 조약을 알아서 폐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영국은 이미 산업혁명이 이뤄지고 있던 중이었다. 상품 생산성이 향상된 영국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게 됐다. 영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해외시장의 확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해외시장 확장에는 전쟁이 불가피하다. 나는 이 논리를 내세워 대륙봉쇄령을 내렸던 것이다. 영국이 머지않아 우리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문호도 개방하라며 전쟁을 걸어올 것이라는 논리에서 말이다.
대륙봉쇄령은 영국의 경제에 충격을 가하기 위한 일종의 보호무역정책이었다. 프랑스에서부터 시작해 프랑스의 점령 지역, 나아가 대륙 전체에서 영국의 상품을 배척하도록 한 것이다. 이 정책으로 프랑스의 산업 발달도 꾀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프랑스가 대륙을 지배하는 체제에 작은 구멍이라도 보이면 틀림없이 영국이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나는 여태껏 행해왔던 나의 군사 정복과 경제 정책이 합일된 형태인 대륙봉쇄령에 내 운명을 걸었다. 영국까지 내 손에 넣고자 하는 욕심은 이제 더 이상 욕심이 아닌 현실이 되리라 기대해 본다.

참고: 저서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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