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을 시동을 걸다
꺼지지 않을 시동을 걸다
  • 김유진 기자
  • 승인 2011.11.07
  • 호수 1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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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꿈꾸는 명장, 박병일<카123텍> 대표

사전적 정의의 ‘명장’은 한 분야에서 20년 이상 종사하면서 장인정신이 투철함은 물론 뛰어난 기능과 함께 기술발전에 공헌한 인물에게 부여하는 칭호다. 오랜 시간 자동차 정비의 길만 걸어온 그의 손에는 항상 장비와 펜이 있었다. 그가 쓴 책은 20만 명의 기술발전에 공헌했다. 그는 명장의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는 사람이다.

어린 소년의 이른 세상

어릴 적 그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각종 미술대회에서 학교 대표로 상을 여럿 받아오기도 했다. 선생님도 그림에 재능이 있으니 화가를 하면 무조건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당연히 화가의 길을 걷게될 줄 알았던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잠결에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어요. 육남매 중 첫째인 저 하나는 제대로 공부시켜야 되지 않겠냐며 집을 팔자는 얘기였죠. 아버님이 전통 기와를 만드셨는데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면서 기와가 잘 팔리지 않았거든요. 그 당시 조선 기와로 집을 지으려면 구청에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허가를 해주지 않았어요.”

그가 그렸던 인생 그림에 자동차 기술자는 없었다. 하지만 장남이라는 위치가 그를 움직였다. 마음을 다잡고 책임감이라는 물감으로 새로운 도화지를 채워 나갔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지만 어린 마음에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어요. 나는 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꿈도 버리고 이런 고생을 해야 되는지. 하지만 이건 현실이고 갑자기 바뀔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용기를 내 세상에 뛰어든 어린 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 곳은 없었다. 정비 기술을 배우고 싶었지만 공장에 취직하기란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웠다. 당시 서울 시내에는 버스가 600대밖에 없었다.

“석 달 동안 사정을 해도 안 받아주더라고요. 어려서 안 되고, 사람 다 구해서 안 되고, 이런 저런 이유로 거절당했죠. 그런데 매일 아침마다 와서 조르니까 공장장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요. 1년 동안 점심 한 끼만 먹여 주는 조건으로 공장에 들어갔죠.”

사고는 조이고

자동차 기술자로서 첫걸음은 그렇게 시작됐다. ‘기술은 자식에게만 가르쳐준다’는 말이 있던 시절이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자동차의 일인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중학교를 중퇴한 그에게 선뜻 기술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석 달 동안 청계천 헌책방을 뒤져가며 일본의 ‘자동차 대백과사전’ 번역본을 구해 이론 공부를 시작했다.

“이론은 그걸로 공부하는데 실무도 익혀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오늘은 뭘 배우겠다 싶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심부름을 보내는 거에요. 반장들이 기술을 안 가르쳐 주니까 그 아래 중간 기술자였던 아는 형님에게 배우기로 했어요. 나는 형님에게 이론을 가르쳐 주고 형님은 나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고. 요새 말로 하면 빅딜 한거죠.”

이론적 기반이 있어서였는지 그는 남들보다 빨리 기술을 터득했다. 다른 사람은 10년 정도 일해야 오를 수 있는 반장자리를 2년 반 만에 꿰찼다. 하루 한 끼만 해결해 주기로 했던 공장에서 월급을 주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을 걸고 카센터를 차렸고 돈을 조금씩 모아 지금의 공장을 세웠다. 돈 걱정을 하지 않게 되고서도 자동차에 대한 그의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1999년에 자동차 급발진 사고로 한창 시끄러웠어요. 텔레비전을 틀기만 하면 관련뉴스가 나왔죠. 그런데 인터뷰하는 전문가들이 옛날에 대학에서 배웠을 것 같은 이론으로 설명하더라고요. 급발진은 있을 수 없다고 하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전 세계적으로 아직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대요. 그 말에 딱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는 급발진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의 차로 석 달 간 이런 저런 연구를 거듭한 끝에 원인을 밝혀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대로는 믿을 수 없었다. 자비로 자동차 5대를 사서 실험했다. 5대 모두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는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자동차에 접목된 전자 제어 장치가 원인이었다.

“연구 결과를 들고 건설교통부(현 국토해양부)에 찾아갔어요. 그런데 담당 공무원이 제 카센터 사장 명함을 보더니 완전히 무시하더라고요. 다리를 꼬면서 우리가 다 해본거니까 알아서 하겠다고, 당신은 필요없대요. 참 어이가 없었죠.”

울분이 터진 그는 10년 넘게 기고하고 있던 ‘월간 카테크’ 잡지사로 향했다. 그 날은 원고를 넘겨주는 날이었다.

“편집장이 뭐 하러 직접 왔냐고 하길래 건설교통부에 갔다오는 길이라고 말했어요. 급발진의 원인을 밝혀가지고 갔는데 그야말로 찬 대접을 받고 왔다고. 그 사람이 깜짝 놀라더라고요. 내 기술은 인정하면서도 세계 최초라니까 놀랐던 거지.”

편집장에게 알려진 사실은 방송국에도 알려져 사회적 이슈가 됐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자동차 분야의 보이지 않는 권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기술은 풀고

“외국에서는 어디 출신이든 실력이 있으면 인정받을 수 있어요. 직업에 귀천이 없죠.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요. 기성세대가 정해놓은 길이 아니면 인정을 해주지 않아요.”

정비 기술은 인정받았지만 가방끈이 짧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실력을 인정받아 대학 자동차과에도 강의를 하러 나갔지만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다. 마침 노동부(현 노동고용부)에서 국가 기능 장려 정책 논문 공모전을 주최했다.

“방향을 제시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그냥 말하면 인정을 못 받잖아요. 논문을 써서 상을 받으면 인정도 받고 다른 사람들도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논문을 썼어요.”

생전 처음 논문을 쓰기 위해 기존의 논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혼자서 논문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을 공부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최우수상을 받았다.

힘들게 기술을 배우던 젊었을 적 자신을 떠올리며 15년간 20만 명의 현장 기술자들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책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직접 정비를 하며 겪었던 사례와 기술을 엮어 모은 것이 벌써 37권이나 된다. 후배들이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며 쓴 책. 그 책이 지금은 그들의 디딤돌이 되고 있다.

“처음에는 안 좋은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다른 기술자들에겐 그네들도 어렵게 익힌 기술을 내가 아무렇지 않게 전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거에요. 하지만 우리나라가 성장하기 위해선 기술이 발전해야 돼요. 그래서 이렇게 기술을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죠.”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2002년에는 ‘자동차 명장’으로, 2006년에는 ‘기능한국인’으로 뽑혔다. 2008년에는 자격증 최고 등급인 ‘기술사’를 취득하기도 했다. 자동차 기술 부분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것이다.

2006년에는 ‘한국 마이스터 연합회’를 만들었다. 다양한 기술을 가진 기술자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펼치기 위해서다. 그는 ‘자동차 명장’뿐 아니라 진정한 ‘삶’의 명장이 되고 싶었다.

“인천에는 49개의 작은 섬들이 있어요. 육지에는 봉사자들이 많기 때문에 섬에 가서 봉사를 해요. 도배도 하고 보일러, 전기도 고쳐주고 어르신들 미용도 해드려요. 예전에는 저와 제 가족만을 위해 살았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도 돌아볼 수 있게 된거죠. 너무 행복해요.”

그의 새로운 꿈은 ‘기술기능인’을 위한 회관을 세우는 것이다. 기술기능인들이 은퇴한 후에도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싶어서다. 그들이 보유한 기술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도록 제도와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그의 최종목표다. 자동차 정비계의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아직도 그의 열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무엇이 그를 멈추지 않게 하는 것일까.

“저는 아직도 현장에 나가서 자동차를 정비해요. 한겨울에는 손도 시렵고 힘들죠. 그래도 제 가슴에 박은 꿈이 있기 때문에 행복해요. 그 꿈이 희박해보여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100% 올인하면 이룰 수 있다고 믿어요.”            

 사진 제공: 카123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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