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미소는 내게 햇볕이 되었네
그 미소는 내게 햇볕이 되었네
  • 박욱진 기자
  • 승인 2011.10.31
  • 호수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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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웃음으로 살아가는 해바라기, 박섭묵<삐에로 극단> 단장

박섭묵씨가 인형극단을 시작한지 벌써 15년이 넘어간다.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이제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인생의 쓴맛도 단맛도 모두 맛봤다. 지나간 세월과 인생의 질곡은 얼굴에 주름을 아로새겼지만 그의 웃음만은 빛바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공연을 보여주며 그 녀석들의 웃음을 닮게 된 것이다.

▲ <'삐에로 극단'연습실엔 공연소품들이 가득했다. 조금 어둡고 어수선한 연습실에서 오래 지냈을 그는 인터뷰 내내 밝게웃었다>

나의 색을 고집하다

나의 색을 고집하다삐에로 극단의 단장 박섭묵씨는 극단을 시작하기 전엔 길거리에서 물건도 팔아보고 광대도 하고 공장에서 침대도 만들었다. 그는 십여 개가 넘는 직업을 옮겨 다녔지만 자신을 만족시킬 ‘무언가’를 찾을 수 없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체육을 가르치면서 그는 마침내 찾을 수 있었다. 아이들의 밝고 순수한 미소는 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어서 시작하게 된 거죠. 아이들이 순수하게 웃을 때 정말 사랑스러워요. 체육교사로 일하면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인형극이었죠.”

 인형극은 도제방식으로 전수된다. 스승이 없던 박 단장은 공연 초기 전통성이 없다며 많은 무시를 당했다. 편찮으신 부모님과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니 1년 넘게 무보수로 스승을 따라다니며 배울 여력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스승이 없어 무시하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웠다.

“오히려 스스로 타극단과 교류를 하지 않으려 했어요. 별로 날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또 제가 모방을 잘하는 사람이라 공연을 보고나면 따라할 것 같았어요. 자기만의 색이 있어야 하는데 교류를 하면 각자의 색이 희석될 것 같았어요. 실제로 '공연' 하면 대학로라는데 대학로에 가본 적도 없어요.”

그는 관객과의 소통이 자신의 인형극을 통해 표현하는 색이라 한다.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시작한 극단 활동인데 정작 아이들의 참여가 없다면 극단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그의 공연 절반은 아이들이 끌고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공연 종류는 전통마당극이에요.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거죠. 관객과 같이 호흡할 때 제가 추구하는 연극의 색이 보인다고 봐요. 실제로 저희 공연을 보시면 아이들이 극 중간에 나와 함께 참여하기도 해요.”

특이하게도 삐에로 극단은 전문적으로 공연을 배운 사람이 없다. 전문 배우를 못 구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쓰지 않았다.

“처음부터 가르치려면 어렵죠. 어렵긴 하지만 또 백지 같기도 하잖아요. 묻히면 색이 입혀지죠. 공장 다니던 사람도 있고, 용접공도 있고, 마트에서 일하다 온 사람도 있어요. 이 바닥에 생소한 사람들을 데려다 하는 편이에요.”


한 가정을 구한 솜뭉치 인형

삐에로 극단은 주로 성교육을 주제로 인형극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박 단장은 성을 잘 이해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의 무지에서 출발했다. 

“어떤 분이 ‘성’하면 뭐가 생각 나냐고 물으신 적이 있어요. 전 섹스라고 답했죠. 애들 대상으로 일하면서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냐며 혼났죠. 반성을 하고 사비를 들여 성교육을 받았어요. 하루에 아이들이 열넷씩 성추행을 당하고 일 년이면 몇십 명씩 없어진대요. 성교육이 꼭 필요하긴 한데 기존의 성교육은 애기들이 이해하기도 힘들고 재미도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만들어서 시연을 하게 된거죠.”

그는 성교육에만 그치지 않고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장애인, 다문화, 비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교육공연을 진행했다.

“그냥 아이들과 웃고 돌아서는 것보다 애들한테 필요한 공연을 해서 실제로 불미스런 일을 당하지 않게 하고 싶어요. 성교육뿐 아니라 다른 교육도 살면서 도움이 될 테니까 한번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만들게 됐죠.”

실제로 그의 공연은 한 가정의 행복을 지킬 수 있었다. 경기도 평택에서의 성교육 공연이 끝난 며칠 뒤였다. 공연을 본 아이의 부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가 유괴될 뻔 했는데 성교육 공연 때 배운 대처방법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부모가 맞벌이를 해 집을 비운 사이 아이가 혼자 있었는데 이를 안 유괴범이 범죄를 저지르려 한 것이다.

“아빠 친구라는 사람이 문 좀 열어달라고 했대요. 별 의심없이 문을 열어줬다가 길에 끌려 나갔대요. 그때 공연에서 배운 걸 떠올리고 아이가 막 소리를 지른 거죠. 주변에 있던 분들이 도와주셔서 다행히 아이가 큰일 당하지 않았죠. 이런 얘기 들으면 참 뿌듯해요. 한 가족을 살린 것이니까요. 우리 아들도 제가 이런 일을 하는 것에 굉장히 자부심을 느껴요. 한마디로 살맛나는 거죠.”


고통은 반으로 웃음은 배로

환한 무대 위에선 밝게 웃지만, 불 꺼진 조명 아래서는 그의 표정도 함께 어두워진다. 박 단장은 사실 10만명에 4명꼴로 발생한다는 ‘베체트병’이란 원인불명의 난치병 환자다. 베체트병은 입, 음부, 안구 등 신체부위에 무작위로 궤양이 생기는 병이다.

“원래는 건강했어요. 제가 2년 동안 매주 공연 때문에 부산과 서울을 왕래할 때가 있었는데 그 때 몸이 망가져서 베체트병이 시작됐어요. 그 시절에 많은 걸 배웠지만 대신 건강을 잃은거죠. 올 추석때도 컨디션 조절을 못해서 궤양이 생겼어요. 이번엔 한 열흘간 죽은 듯이 누워 있었죠.”

익살스럽기만한 얼굴 뒤로는 생각보다 많은 고통이 숨겨져 있다. 직업상 몸으로 직접 뛰어야하는 일이여서 고된 생활의 연속이다. 더군다나 베체트병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다. 한번쯤 극단을 시작한 것을 후회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극단 일을 한 것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이 정도 고통은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한테 물어봐요. 다 근심걱정이 있죠. 제 병도 누구나 하나씩은 갖고 있는 근심걱정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긍정적으로 봐야죠. 그것밖에 방법이 없으니 오히려 명쾌해요. 완전히 낫기는 어려우니까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거죠.”

그는 결코 베체트병을 걸림돌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디딤돌로 생각한다. 디딤돌을 밟고 더 높이 올라설 수 있던 것이었을까. 자신의 고통을 알고 나니 다른 사람의 고통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듬고 싶어 시작한 무료 봉사공연은 이제 150여 회가 넘어간다. 무엇이 힘들고 고된 극단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를 봉사공연에 뛰어들게 했을까.

“그 친구들 눈을 보면 참 맑아요. 오면 막 안아주고 잘 왔다고 반겨요. 전 느껴요. 그건 가본 사람만 알아요. 그 따뜻함을 느끼면 얼마나 포근한지 몰라요. 제가 행복을 주러 갔지만 오히려 더 큰 행복을 받고와요. 제가 애들한테 사랑을 받잖아요. 받은 것을 작게나마 돌려 주는거죠.”

그는 앞으로 집단따돌림에 대한 무언극을 하고 싶다고 한다. 혹시 앞으로 예술 목적의 공연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그는 그런 분야를 하는 사람들은 이미 많다며 아이들한테 도움이 되는 공연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난 아이들한테 에너지를 받으면서 살아가요. 식물이 햇볕을 받고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아이들의 순수한 미소가 내겐 햇볕이죠. 아이들이 살아가며 필요한 걸 내가 전해줬단 생각에 뿌듯해요. 지금처럼 공연이 끝난 뒤에도 햇볕을 기억하며 다시 다음 공연을 준비하며 살아갈 거에요.”

사진 류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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