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시대의 희생양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시대의 희생양
  • 이나영 기자
  • 승인 2011.10.10
  • 호수 1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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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년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
▲ 비제 르브룅이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
“미안해요, 일부러 발을 밟은 것이 아니었어요.” 자신의 목을 내리칠 내게 그녀가 내뱉은 마지막 한 마디였다. 당장 자신의 목숨이 끊어질 판에 어쩜 저리도 순수한 말을 할 수 있었던 건지. 단두대 앞에 선 그녀를 처형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왕비란 그녀의 신분보다 상냥한 그 한마디가 집행자인 나를 흔들었다. 대체 그녀가 어떤 죄를 지었기에 국민들은 이토록 그녀를 미워했을까.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께서 머무시던 베르사유주는 인구의 2할이 궁정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살았다. 격식을 차린 옷만 입으면 일반 대중이 궁정에 드나들기도 쉬웠다. 왕비에 관한 이야기는 이들에 의해 속속들이 퍼져나갔다.

왕비의 결혼은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공국 사이의 정략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14살의 그녀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품을 떠나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프랑스로 왔다. 그 후 어린 그녀는 독서나 진지한 일을 지독히 싫어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를 평범한 소녀의 행동이라기 보단 왕실의 법도에 따르지 못하는 철없는 왕비의 행실로 봤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왕궁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많은 시선을 받게 된 어린 소녀였던 그녀에게 동정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녀는 남편인 루이 16세께서 왕위에 오르고 나서 왕비가 된 후 폐하와의 불화설에 휩싸였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폐하께서는 별다른 취미가 없으셨고, 아내와의 시간도 지겨워 하셨다고 한다. 왕비께선 느지막하게 일어나 오후엔 주로 연극, 노름, 오페라, 사냥, 경마 등으로 유흥을 즐기셨다. 남편과의 드문 교류, 도처에 나도는 불화설 속에서 외로웠던 탓이었을까. 왕비께선 노름과 치장으로 많은 빚을 지셨고, 이를 알게 된 백성들은 그녀를 비난했다.

대중들 사이엔 왕비를 희화화한 소설과 그림이 빈번했는데 입으로 담을 수 없는 변태적인 내용이 난무했다. 성적인 면에서 그녀를 희롱하는 것들이 주류였다. 왕비 이전에 여성인 왕비께서 마음에 상처를 입으셨음은 분명했을 것이다. 흥청망청 유흥을 즐기는 왕비가 백성들의 눈에 아니꼽게 보일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백성들이 그녀를 가벼이 생각했기에 비방도 더 심해졌던 것이 아닐까. 왕비께서도 백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계셨고 그로 인해 많이 괴로워하셨다고 했다.

왕비께선 프랑스 왕실에서 유일하게 소작인의 밭으로 마차를 몰아 밭을 망치는 짓을 거부하셨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관해서도 잘 알고 계셨다. 백성들에게 관심이 없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비방하는 이들에게 복수하기보다 “세 배로 선행을 하겠다”고 했단다. 평소 궁정에서도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대해 궁인들은 그녀를 상당히 좋아했다.

“남편이 결백했듯이 자신도 결백하기에” 남편과 같이 당당히 죽음을 맞겠다고 하셨던 왕비. 지금 프랑스는 너무도 혼란스럽다. 백성들은 그녀를 비방함으로써 혼란한 세태를 극복하려 했던 것인 지도 모른다. 시대의 희생양으로 정치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의 목을 자른 내 마음 속에 여느 사형 집행 때완 달리 왠지 모를 꺼림칙함이 남았다.    

참고: 저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마리 앙투아네트 신화」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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