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을 잃은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
영광을 잃은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
  • 김명지 기자
  • 승인 2011.09.17
  • 호수 13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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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8년 9월 15일 영국과의 해전에서 패한 에스파냐
                                                                                                                                                               
▲ <펠리페 2세>

“폐하, 무적함대가 결국…” 나의 충성스런 신하는 일그러진 얼굴로 소식을 전하다가 채 말을 잇지 못한다. 그간 우리 에스파냐 제국의 영지를 약탈하던 영국을 혼쭐내주기 위해 출정했던 우리의 군대가 대패했다는 내용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 치욕스런 패배의 주인공이 우리 에스파냐고 그 군대의 국왕이 바로 나, 펠리페 2세라니. 누가 ‘무적의’ 스페인을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애석하게도 패배의 기운은 이미 일찌감치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지휘관의 능력을 가장 탓하고 싶다. 본래 무적함대를 조직했던 산타 크루즈 후작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탓에 서둘러 메디나 시도니아 백작을 총사령관으로 기용했던 것이 최대의 과오였다. 그는 연로했으며 해상전투 경험이 전무한 인물이었다.

그에 반해 오랫동안 실무경험으로 다져진 영국해군의 드레이크 제독은 그 능력이 이미 절정에 달해있던 터였다. 그는 바람이 부는 방향을 전술에 활용했고 불타는 배를 사용해 우리 함대의 대열과 균형을 깼다. 그뿐인가. 그들은 우리 군함보다 훨씬 앞선 무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선원들의 능력에 기술, 지휘력 중 그 어느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에스파냐의 군대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 당연하다.

과거 영국과의 혼인동맹이 성공했더라면 상황은 변할 수 있었을까. 사실 나는 영국의 여왕인 메리 1세와 혼인해 영국과의 동맹을 돈독히 한 바 있다. 메리 1세의 어머니인 캐서린 왕비가 에스파냐 아라곤 출신이었으므로 혼인은 순탄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그 안정도 잠시, 가련한 나의 부인은 일찍 세상을 떴고 그의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의 자리를 물려받으며 고난은 시작됐다. 나는 모호해진 에스파냐와 영국의 동맹을 재차 다지기 위해 그녀에게 혼인 동맹을 제안했다.

그 때 그녀가 뭐라 말했던가. “나는 영국과 결혼했습니다.” 당시 나는 무너진 내 자존심만을 가엽게 여겼다. 그러나 그때 잃은 것이 자존심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닫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해야 영광스러웠던 에스파냐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가. 지난 1577년 그리스 부근에서 벌인 ‘레판토해전’에서 거둔 영광은 왜 다시 재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당시 우리 에스파냐와 교황청 군대는 내 이복동생 돈 후안의 뛰어난 지휘력에 힘입어 기동력 있는 움직임을 펼쳤다. 강력한 대포가 장착된 대형범선으로 이후 무적함대의 모체가 된 갤리어스의 공도 컸다. 우리의 소총과 그들의 활 역시 비교할 바가 못됐다.

이렇게 시작된 에스파냐는 이베리아반도, 벨기에·룩셈부르크 부근, 이탈리아 부근은 물론 중남미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방대한 제국을 거느리며 경제적, 문화적 번성을 누렸다. 그야말로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지금, 돈 후안과 같은 지휘관, 갤리어스와 같은 뛰어난 무기 기술은 왜 다시 에스파냐에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해전에 패배함으로써 이미 영국으로 넘어가고 있는 유럽의 패권, 비어가는 왕실의 국고는 나를 괴롭게 한다. 유럽의 중심, 나아가 세계의 중심이고자 했던 에스파냐 제국이 처참하게 흔들리고 있다. 지금은 에스파냐의 최전성기를 이끈 나 펠리페 2세의 재위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이다.

나는 국왕으로서, 에스파냐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여러 이유들을 이해해보려 한다. 그 중 가장 명확한 사실은 슬프게도 내가 에스파냐의 최전성기와 몰락을 함께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도움: 황보영조<경북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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